[예술교육이 세상을 바꾼다] [1] 불우청소년, 음악으로 거듭나다

입력 : 2010.05.10 00:54

베네수엘라 2세~17세 29만명, 무료로 클래식음악 배운다
35년전 시작된 '엘 시스테마' 세계 음악교육 모범 사례로… 名지휘자 두다멜 등 배출

오는 25~28일 서울 코엑스에서 제2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가 열린다. 유네스코 회원국들의 정부 인사와 NGO(비정부기구) 회원, 예술가 등 2000명이 모여 예술교육의 경험을 교환하고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교육은 21세기 국가의 총체적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한국에서도 예술의 사회성과 교육의 창조성을 높이기 위해 예술교육의 세계적인 성공 사례들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간간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섭씨 30도에 이르는 한낮의 무더위를 잠시 달래주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남부의 링코나다 음악센터. 지난달 21일 낮 기자가 찾았을 때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이곳에 모여든 유소년 오케스트라 아이들은 각자 악기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지난해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6학년 마르셀 실바(12)군이 악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연주에 따라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이 교실 가득히 울려 퍼졌다.

베네수엘라에선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인기 스타다. 실바도 지난해 베네수엘라 최고의 청소년 악단인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두 차례 가본 뒤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알리얀드로 카레뇨의 팬이 됐다. 실바는 수줍은 표정으로 "저도 언젠가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불우 청소년들, 클래식 음악의 희망으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링코나다 교육센터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오케스트라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엘 시스테마’교육을 통해 배출된 지휘자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21세기 클래식 음악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오른쪽〉/카라카스=김성현 기자,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 제공
불우 청소년들, 클래식 음악의 희망으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링코나다 교육센터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오케스트라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엘 시스테마’교육을 통해 배출된 지휘자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21세기 클래식 음악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오른쪽〉/카라카스=김성현 기자,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 제공
건너편 교실에선 목관과 금관 악기로 구성된 25명의 앙상블이 '핑크팬더' 같은 만화영화 모음곡을 한창 연습 중이었다. 8세 소년 에우헤니오 카레뇨도 옆자리의 형들을 따라서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소년은 "하늘 높이 나는 것 같은 트럼펫의 맑은소리가 좋다"고 했다.

지난 1월 문을 연 이 교육센터는 23개 교실에서 1500여명의 학생이 매주 6일간 하루 4시간씩 오케스트라 교육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 전역에는 '누클레오'로 불리는 이런 음악센터가 214개 있고, 2세부터 17세까지 어린이와 청소년 29만명이 음악 교육을 받는다. 지난 1975년 경제학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인 호세 아브레우 박사의 주창으로 시작해서 현재 음악 교육의 세계적인 모범으로 꼽히는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현장이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서 자라난 학생들은 다시 음악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친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에밀카르 아폰테(25)는 더블베이스 지도교사로 활동한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 7세부터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던 아폰테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내가 배웠던 것을 돌려주기 위해 4년 전부터 여기서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엘 시스테마'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75년 아브레우 박사의 첫 오케스트라 수업에 배우러 온 학생은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1977년 스코틀랜드의 국제경연대회에서 이들의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입상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정부와 미주개발은행의 후원을 포함해 한 해 예산만 4200만달러(465억여원)에 이른다.

'엘 시스테마'는 총기나 마약, 강력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베네수엘라의 청소년에게 쉼터이자 보호소 역할도 한다. 18세 때부터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온갖 범죄와 가정 문제에서 끔찍한 경험을 갖고 모인 아이들도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희망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엘 시스테마'가 여느 음악교육과 다른 점은 독주(獨奏)가 아니라 합주를 통해 음악을 배워나간다는 점이다. 비발디와 바흐의 음악을 처음 접해보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정확히 박자를 맞추는 것부터 쉽지 않지만 선생님은 연방 손뼉을 치면서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문했다. 실수를 하거나 틀려도 도중에 멈추는 법 없이 계속 나아가고, 개인 레슨이 아니라 실전을 통해 훈련하며, 독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통해 협동을 배운다는 점이 '엘 시스테마'의 특징이다.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베네수엘라의 젊은 음악가들은 세계 음악계의 한복판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지휘자 두다멜은 지난해 미국 명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카라카스의 빈민가에서 자라난 더블베이스 연주자 에딕손 루이즈(24)는 17세의 나이로 베를린 필하모닉에 최연소 입단하는 기염을 토했다. 베를린 필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보다 현재의 음악계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고 격찬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와 같이 예술 교육을 통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10대 청소년의 마약이나 폭력 문제를 미술작품 창작과 전시를 통해서 해결하는 '청소년 표현예술 전시회'를 2006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필리핀 세부의 지역교정갱생센터(CPDRC)에서는 재소자들을 상대로 춤 교육을 실시해 재범률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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