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2.13 16:47
12일, 이배 ‘달집태우기’ 선보여
전통 의례와 현대 미술 한 번에
베니스에서부터 이어진 여정, 청도에서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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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작가 이배가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청도에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부터 이어져 온 달집태우기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앞서 2024년 4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베니스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진행된 작가의 개인전 ‘La Maison de la Lune Brûlée(달집태우기)’는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연계 부대 전시다. 이 전시는 2024년 2월 24일에 청도의 전통문화 ‘달집태우기’ 의식으로 막을 올렸다.
전시 ‘La Maison de la Lune Brûlée(달집태우기)’는 정월대보름의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 의례와 현대 미술이 하나로 엮인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로, 사람과 자연, 동서양을 잇는 주제를 탐구한다. 비엔날레 전시 개막 전, 이배는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소원을 모아 전통 한지 조각에 옮겨 적고 달집에 묶어 태웠다. 이 과정이 담긴 영상은 비디오 설치작 ‘버닝(Burning)’으로 제작돼 베니스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상영됐다. 전시 공간의 바닥과 벽면에 굽이치는 ‘붓질(Brushstroke)’ 3점은 이탈리아 파브리아노(Fabriano)의 친환경 제지를 전통 ‘배첩(marouflage)' 기법으로 공간의 바닥과 벽에 도배하고 청도의 달집이 남긴 숯을 도료 삼아 그린 것으로, 한지 위의 획과 농담이 받아낸 명상과 성찰, 비움과 채움의 공간을 구성한다. 전시장 출구는 베니스 운하로 이어지는데, 이곳에 구조물 ‘달(Moon)’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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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폐막 후 전시장에 설치됐던 ‘붓질(Brushstroke)’과 도배에 사용된 종이를 떼어 한국으로 보냈다. 이후 이 종이를 잘게 찢어 작년에 달집태우기가 열렸던 청도천의 작은 섬 전체에 깔고, 그 위를 베니스 전시에서 선보인 붓질과 동일한 형태로 덮은 뒤 태우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는 대보름 달집태우기 풍습에서 농부가 봄을 맞이하는 강인한 마음으로 달집을 땅에서 올려다봤다면, 이제 청도와 베니스, 서양과 동양을 잇는 순환고리로서 붓질의 여정을 인간 인식의 범위를 넘어 되돌아본다. 베니스에서 상징처럼 부유하던 붓질은 다시 그 본질인 청도로 돌아와 불길 속에서 정화와 재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점화가 시작되자 불길과 함께 많은 양의 연기가 솟아올랐고, 한국의 민속의식과 현대미술이 결합돼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날 날씨가 흐려 구름이 많았는데, 구름과 연기가 공중에서 겹쳐지며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붉은 화염과 섬 위에 구현된 ‘붓질’이 가진 숯의 먹색이 강렬한 대비를 주며 작가가 가진 전통적인 의식을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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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수직적인 형상이 자주 등장하던 과거에 비해, 이번 피날레에서 가로로 긴 형상을 구현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작가는 “가로로 긴 형상은 순환의 이미지를 가진다. 베니스와 한국에서의 여정을 잇고 그에 대한 길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로 활동하며 보여온 작업이 마침내 제가 태어난 고향, 청도에서 매듭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곳에서 완전히 여정이 끝난다기 보다는 태우고 숯이 되고 그것이 다시 작품이 되는 순환의 원리를 담았다”라고 덧붙였다.
고도화된 도시 속에서 현대인은 전통과 자연과 얽힌 자신의 정체성을 잃기 쉽다. 작가 이배의 ‘달집태우기’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인 청도에 대한 뿌리를 작품 속에 녹여내며 자연과 호흡해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이는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경험과 작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작업과 작품을 목격한 관람객에게 번져가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선사한다.
서울과 파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이배(b. 1956) 작가는 30여년 동안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 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이고 있다. 1990년 도불 이후 서양 미술재료 대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재료인 숯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한 작가는 숯이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 순환과 나눔 등의 태생적 관념 위에 작가 특유의 예술적 상상력을 더하여 드로잉, 캔버스, 설치 등의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확장시켜 왔다. 캔버스 위에 절단한 숯 조각들을 빽빽하게 놓고 접합한 후 표면을 연마해낸 이슈드푸(Issu du feu), 숯가루를 짓이겨 미디엄을 사용해 화면에 두껍게 안착시킨 풍경시리즈(Landscape)와 목탄에서 추출한 검은 안료로 캔버스 위에 형태를 그리고 밀랍 같은 두꺼운 재료를 여러 번 덮은 작업인 아크릴미디움(Acrylic meidum),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다양한 형태의 붓질 그대로를 보여주는 붓질(Brushstroke), 숯 자체 또는 브론즈로 보여주는 조각 시리즈 등이 있다. 그는 숯을 사용하는 이유가 그 안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프랑스 기메 미술관, 페르네브랑카 파운데이션, 대구미술관,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베이징 투데이 아트미술관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마그파운데이션, 프랑스 파리 기메 박물관, 스페인 쁘리바도 알레 그로 재단을 포함한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