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에 이런 매력이?… ‘펜슬리즘’ 연필 드로잉의 세계

입력 : 2020.07.10 16:58

원초적 재료로 그려낸 치열한 연필화 눈길
김범중·문기전·박미현·표영실 소묘 작가 4인전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

김범중作, Oscillo 외, 장지에 펜슬, 각 20x100cm, 2019
김범중作, Oscillo 외, 장지에 펜슬, 각 20x100cm, 2019
 
“어떠한 재료보다도 직관적이고 무의식에 가깝지 않을까요. 손에 들어가는 힘과 숨결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기에 매 순간을 수행하듯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거든요.”
 
연필은 흔히 작업의 밑작업 또는 노트 구석에 그리는 낙서의 재료로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필이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원초적이고도 치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필 드로잉전이 열린다. ‘펜슬리즘(Pencilism)’이라는 새로운 이름 하에 김범중, 문기전, 박미현, 표영실 작가의 각기 다른 수준 높은 연필화를 관람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펜슬리즘’은 기초재료로만 인식돼 온 연필에 대한 새로운 위상을 부여하고자 작가들이 직접 정한 타이틀로, 이 전시명을 따라 작가들은 스스로를 ‘펜슬리스트’로 칭하며 재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연필은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한번쯤은 손에 잡아본 학용품 중 하나일 테다. 그러나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단출해진 화구(畫具)는 보다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으로,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필이라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서로 다르게 풀어낸 작가 4인의 각기 다른 작품에, 연필 한 자루에 이토록 다채로운 개성이 있었는지 새삼 놀란다.
 
‘드로잉 오딧세이: 더 펜슬리즘’ 전시 전경 /갤러리밈
‘드로잉 오딧세이: 더 펜슬리즘’ 전시 전경 /갤러리밈
 
김범중은 끝없이 퍼져나가는 음파와 우주의 조화를 연필선으로 시각화하는 작가로, 정교한 선의 반복은 캔버스 화면 밖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치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음파를 시각적으로 건져낸 것처럼 비춰진다. 현악기 같은 비율을 가진 화면은 악기의 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구음을 연상한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배열된 화면은 그자체가 분절화 되고 그것은 하나의 단위가 돼 설치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손끝의 흔들림까지 담은 수행적인 연필선으로 이뤄진 문기전의 작품에는 ‘왜 이렇게 보이고 생각되는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세계관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난다. 하얀 종이 배경 안에 점이 번져 만들어진 얼룩들이 다양하게 분포하는데, 먼지입자가 뭉쳐지거나 흩어져서 별이 생성 소멸되는 우주의 풍경부터 거듭해 확대된 미시세계의 흐릿한 모습까지 다양한 형태가 연상된다.
 
문기전作 Quantum, 판화지에 펜슬, 100x100cm, 2019
문기전作 Quantum, 판화지에 펜슬, 100x100cm, 2019
박미현作, 04, 보드지에 펜슬, 40x50cm, 2014
박미현作, 04, 보드지에 펜슬, 40x50cm, 2014
 
박미현의 작품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그려진 기호처럼 보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친근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는 강렬한 흑백 대비가 특징이다. 검은 바탕에 하얀 창문이 연상되는 도형이 있는 작품에서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배치된 원들은 정지 가운데 움직임이 잠재해 있는 듯하다. 마티에르가 느껴질 정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흑연은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표영실作, 상실의 무게, 종이에 펜슬, 38x28cm, 2019
표영실作, 상실의 무게, 종이에 펜슬, 38x28cm, 2019
 
표영실의 화면은 추상적인 감정이 연필의 농담 끝에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섬세하고 선이 얇은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특유의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감정 상태를 상기한다. 외곽선을 모호하게 하는 흑연 입자의 흩어짐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누런 액체의 표현 등은 인물·인체의 표현에 강한 감정을 싣는다. 누구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전시된 작품들은 마치 한 편의 시를 이미지화한 것 같은 감상을 느낄 수 있다. 
 
‘드로잉 오딧세이: 더 펜슬리즘’ 전시 전경 /윤다함 기자
‘드로잉 오딧세이: 더 펜슬리즘’ 전시 전경 /윤다함 기자
 
이선영 미술평론가는 전시 서문에서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휴무 없이 19일까지 열린다. 전시장 입구에는 정갈하게 깎인 연필이 준비돼 있어 원한다면 가져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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