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2.18 09:05
[연극 엘리펀트 송]
사람도 아닌데 캐스팅 보드에 올라 있는 코끼리 인형의 정체는?
정신없이 오가는 ‘핑퐁 대화’만으로 박진감 넘치는 서사
미궁 속으로 빠져들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어지는 충격 반전

캐나다의 한 병원에서 의사 로렌스가 일언반구도 없이 돌연 사라졌다. 실종 신고는 48시간 후에나 가능한 상황이라 경찰은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지 않고,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환자 마이클의 증언이 유일한 단서인 상황. 졸지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출근하게 된 병원장 그린버그는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혹시 마이클이 어떤 애인지 알고 계세요?” 이 와중에 수간호사 피터슨은 이 병원에 마이클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며 의미 모를 경고를 해오고, 마침내 나타난 마이클은 알 수 없는 코끼리 얘기만 늘어놓는다.
연극 ‘엘리펀트 송’은 로렌스의 행방을 캐내려는 그린버그와 진실을 감추려는 마이클이 치밀하게 엇갈리는 대화를 통해 벌이는 고도의 심리전을 다룬다. 실종 사건은 순식간에 로렌스와 마이클을 각각 가해자와 피해자로 하는 성추행 문제로 번진다. 과거 한 의사의 성추행 논란으로 폐원 위기를 겪은 그린버그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마이클은 이 지점을 파고들어 문제를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그런가 하면 마이클에게 병명과 증상이 적힌 진료 기록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껏 만나온 의사들은 첫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진료 기록만 보고서 편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워게임은 둘 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탓에 말발로는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는다. 게임의 판도를 뒤집는 것은 마이클이 숨긴 로렌스의 쪽지, 그린버그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만 받을 수 있는 초콜릿 등 두 인물이 상황에 맞춰 내보이는 패다.

한쪽 벽면이 기울어진 무대는 환자와의 상담을 위해 아늑하게 꾸민 실내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한다.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과 금방이라도 캐럴이 울려 퍼질 것처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끝을 알 수 없는 심리전과 대비를 이뤄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줄곧 코끼리 얘기를 하는 것 말고는 정신 병원에 들어올 이유가 없어 보이던 마이클도 슬슬 어린 시절의 기억을 털어놓으며 불안정한 심리를 내비친다. “정말 멋진 동물 아니니, 미카엘?”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 만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도 모르더니, 눈앞에서 코끼리를 사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보여준다. 상처받은 마이클에게 코끼리 인형을 선물하며 코끼리 노래를 불러준 어머니조차 자신의 성악가로서의 입지에만 목숨 걸 뿐 아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분노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의 발단인 로렌스의 실종마저 잊게 만든다.

결말에 다다라 그린버그와 관객이 마주한 진실은 생각보다 허무하다. 성추행부터 시작해 코끼리를 죽인 총성까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던 극은 진실을 위해 쏟아온 시간과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 허탈함을 채우는 것은 이러한 방식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곧이곧대로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마이클에 대한 연민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어머니가 준 코끼리 인형 안소니와 코끼리 노래뿐이다. 사람도 아닌 안소니가 그날그날의 출연진을 알리는 캐스팅 보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일 터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마이클을 안쓰러워하던 관객은 갑작스레 숨이 턱 막히는 반전을 마주한다. 그 순간 극은 마이클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흘린 대사와 곳곳에 깔린 복선을 되새기게 한다. 진료 기록을 보지 않고 마이클의 이야기를 들어준 그린버그에 감동하던 관객도 이제는 그를 원망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헷갈린다.
캐나다 극작가 니콜라스 빌런(Nicolas Billon)의 데뷔작으로 2004년 첫선을 보인 작품은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2014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국내에서는 2015년 초연 이후 2016년과 2017년 연이은 공연을 마치고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무대나 장면 전환을 위한 암전 한 번 없이 진행되는 파워게임은 세 배우가 함의를 품은 대사를 탁구 경기처럼 빠르게 주고받는 것만으로 보는 이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배우에 따라 달라지는 감상과 결말까지 알고 있는 채로 복선을 발견하는 재미는 극장을 다시 찾는 관객이 많은 비결이다. 내년 2월 2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