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칼을 들어라, 스위니” 이발사의 잔혹한 복수극 속 통쾌한 블랙 코미디

입력 : 2019.11.29 18:16

[뮤지컬 스위니토드]
손님이 사라지는 이발소 아래층의 실체는 ‘인육 파이’ 가게
불협화음과 폐공장의 만남, ‘스위니토드’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불편한 즐거움

“들어는 봤나, 스위니 토드”로 시작되는 ‘The Ballad of Sweeney Tod’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되며 관객이 괴담을 듣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오디컴퍼니㈜
“들어는 봤나, 스위니 토드”로 시작되는 ‘The Ballad of Sweeney Tod’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되며 관객이 괴담을 듣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오디컴퍼니㈜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막이 오르기 전 객석에 불이 꺼지면 관객은 하나둘 귀를 막기 시작한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어도 이들을 따라 하는 것이 좋다. 이 뮤지컬은 귀청을 찢어버릴 듯 쇳소리 가득한 굉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서곡은 엄숙한 목소리로 객석을 향해 묻는다. “들어는 봤나, 스위니 토드.” 이 첫 소절과 함께 이발사 탈을 쓴 악마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며 범죄와 위생 문제는 물론 노동 착취도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은 기계의 발달로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이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독일어로 죽음을 뜻하는 토드(Tod)를 주인공으로 도시 전설을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돈을 갈취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에 불과했지만,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복수의 칼을 품은 잔혹한 이발사가 탄생한다.
 
창백한 얼굴의 토드와 러빗 부인은 물론 앙상블 배우도 좀비처럼 분장하고 있어 극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오디컴퍼니㈜
창백한 얼굴의 토드와 러빗 부인은 물론 앙상블 배우도 좀비처럼 분장하고 있어 극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오디컴퍼니㈜
 
젊고 재능 있는 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아내 루시와 어린 딸 조안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를 탐낸 터핀 판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외딴 섬으로 추방당한다. 15년간 죄수로 복역한 후 스위니 토드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그는 루시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터핀이 조안나를 입양해 잘 키워 놓고는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터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새로이 연 그의 이발소는 수상하게도 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은 없고, 그 아래 자리한 러빗 부인의 파이 가게는 매일 파리만 날리더니 어느 날부턴가 촉촉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정평이 나며 손님이 끊이지를 않는다.
 
실력 좋은 이발사라던 토드는 무대 위에서 머리카락이나 수염보다는 사람 목을 훨씬 많이 자른다. 머리를 예쁘게 잘라 달라고 했다가는 목이 잘리고, 수염을 깔끔히 깎아 달라고 했다가는 수명이 깎이고, 기분 좋은 마사지로 천국에 보내 달라고 했다가는 급행열차를 타버리는 수가 있다. 경쟁 업체가 파이에 고양이를 넣어 대박 나자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던 러빗 부인인데, 이제는 사람이 더 가성비가 좋다며 기뻐한다. 어딘가 많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객은 이 상황이 즐겁다 못해 오히려 누군가의 목이 잘려 나가길 기다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헤어진 이후 만나본 적도 없는 딸을 그리는 노랫말을 부르면서도 손에 쥔 칼은 이발소를 찾아온 손님의 목을 계속해서 긋는다. 손님이 일행과 함께 나타나자 그를 죽일 수 없음에 아쉬움을 표하는 토드를 보며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는 토드, 그런 토드에게 구애하는 러빗 부인, 입양한 딸과 결혼하려는 터핀, 새장 안의 새처럼 터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안나, 그런 조안나에게 청혼하는 안소니. 상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까운 극본은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곡을 만나 빛을 발한다. 여덟 번의 토니상과 여덟 번의 그래미상을 비롯해 아카데미상, 퓰리처상, 로렌스 올리비에상을 휩쓴 그는 충돌하는 인물들의 서사를 한 악보 위에 녹여 버린다. 악기 하나쯤은 화음을 방해하거나 난데없이 다른 선율을 연주해 오케스트라의 실수가 아닐까 의심될 수 있지만, 모두 의도된 불협화음이다. 변박이 잦은 데다 공장에서나 들릴 법한 호각 소리도 간간이 울려 아름다운 선율만이 공연장을 채우는 순간을 찾아보기 어렵다. 공연을 다 보고 나서도 단 한 소절도 따라 부를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괴상한 음악은 행복한 결말 따위는 감히 꿈꾸지도 말라 말한다.
 
인육 파이를 만들자는 잔인한 제안을 하는 러빗 부인은 사실 푼수 같은 성격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작품 안에서 웃음을 담당한다. 물론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 충격적인 반전까지 확인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오디컴퍼니㈜
인육 파이를 만들자는 잔인한 제안을 하는 러빗 부인은 사실 푼수 같은 성격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작품 안에서 웃음을 담당한다. 물론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 충격적인 반전까지 확인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오디컴퍼니㈜
 
불편한 음악과 잔혹한 서사 때문일까. 작품은 2007년 초연 당시 흥행 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9년 만에 성사된 재연은 손드하임의 작품을 꾸준히 연출해 오며 ‘손드하임 전문가’라고도 불리는 에릭 셰퍼의 손길을 거쳐 마니아를 형성했지만, 최소한의 소품만으로 각 인물의 상징성을 부각한 단출한 무대가 시대 배경과 극의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이번 공연은 2년 전 뮤지컬 ‘타이타닉’에서 공연장 전체를 선박으로 구현해 관객이 함께 항해하도록 한 폴 드푸가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무대 위 폐공장이 늘어선 우울하고 어두운 뒷골목은 격동의 19세기 런던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기괴한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다.
 
인육 파이를 만들어 파는 두 주인공 외에도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으로 모자라 딸과 결혼하려는 터핀 판사, 부정부패를 일삼는 공무원 비들, 탈모를 고쳐주는 묘약이라며 색소를 섞은 소변을 파는 사기꾼 피렐리까지. 누구 하나 멀쩡하지 않은 이 음울하고 불쾌한 잔혹 동화를 보며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지닌 풍자 때문이다. 공무원 파이는 아주 든든하지만 꽉 막힌 맛, 정치인 뱃살 파이는 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 착한 척 내숭 한 번 떨지 않고 적나라하게 욕설을 뱉으며 각종 파이의 맛을 설명하는 둘의 만담을 있노라면 굴뚝청소부 파이를 먹은 듯 속이 시원해진다. “인류의 역사엔 언제나 윗놈이 아랫놈 등쳐먹지. 정말 기막힌 반전이야, 윗놈이 아랫놈 식사거리.” 부자도 거지도 공평하게 대하는 토드의 이발소와 러빗 부인의 파이 가게를 어느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내년 1월 27일까지 샤롯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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