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1.29 18:11
순수한 작가 정신, 자타 공인의 창의력·예술성… 많은 여성 작가에게 큰 힘
개인전 ‘Then & Now’, 12월 15일까지 갤러리세줄

설치 작가 이경미가 올해로 24회를 맞는 석주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29일 현재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평창동 갤러리세줄에서 진행됐으며 작품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작가가 뒤러의 작품을 오마주한 신작을 선보이는 개인전 ‘Then & Now ; New Vertical Painting - Dürer's Apocalypse’는 12월 15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뒤러(Albrecht Dürer)의 초기작 ‘묵시록’ 연작을 처음 마주한 날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헤센 주립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는 청년 뒤러의 열기에 마치 심장이 덴 것처럼 경탄을 금치 못했다. 유년 시절 백과사전의 색인을 통해 퍼즐 맞추듯 세상을 이해하던 작가는 뒤러의 그림 아래로 수많은 각주가 달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서양인에게 타자로 밀려났다는 사실에 무기력하던 동양 여성 작가로서 시대적, 문화적, 지역적, 사회적으로 멀고도 먼 이 역작과의 조우는 어떤 형태로든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성경과 이탈리아의 풍성한 인물 표현, 독일의 지역 풍경이 뒤러의 뛰어난 구성력으로 한 화폭에 표현된 원화를 바탕으로 작가는 동시대의 다양한 층위를 담아 새로이 구조화했다. 독일에서 체류하던 3년여의 세월은 현지 잡지를 파편적으로 배열해 상징화했고, 7년의 미국 생활은 신대륙의 가볍고 열정적인 문화를 드러내는 만화 이미지를 따와 구성했다. 뒤러의 오마주이기도 한 이 작업은 결국 화가는 조형을 통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현대인은 정보의 과잉이 직조해낸 무작위의 지도 안에서 정보를 끊임없이 포개는 방식으로 분석 없이 즉흥적으로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부터 질병처럼 느껴지던 정보를 직렬로 꿰지 못하고 병렬로 나열해 습득하는 작가의 방식이 요즘은 시대의 징후와 같다. 모든 조형 요소가 정보로 치환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새로운 연작에 구현된 복잡한 구성 속에는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항목을 잇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들어있다. 작가에게 예술 활동이란 이데아를 꿈꾸며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에 상관없이 영원히 지속하는 애잔한 노력의 집합이다.

한편, 석주문화재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조각가 석주 윤영자가 1989년 대학에서 받은 퇴직금 전액과 자신의 작품을 비롯한 개인 소장품을 기증해 설립됐다. 1세대 여성 조각가로서 외길을 고집하며 수많은 작품과 상징 조형물을 제작해 온 그는 예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각종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재단은 여성 작가의 창작 의욕 고취를 위해 미술상을 제정해 매년 작가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으며 야외 조각 공원을 조성하는 등 한국 미술 문화의 진흥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석주미술상은 지금껏 24인의 여성 미술인을 발굴하고 조명해 온 국내 유일의 여성 미술상으로 회화, 조각, 설치, 공예, 평론, 건축 등 장르를 불문하고 참신한 재능과 창의력으로 두각을 보이는 인물을 선정해 상을 수여하고 활동을 장려한다. 특히 이번에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꾸준한 열의를 갖고 활동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이념이나 운동, 양식, 학연, 지연에 좌우되지 않고 석주 윤영자의 순수하고 투철한 작가 정신을 본받아 자타가 공인하는 창조력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자 했다. 윤재원 이사장은 “공부하고 읽으며 즐길 수 있는 15점의 새로운 묵시록이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