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1.26 18:14
[뮤지컬 팬레터]
김유정, 이상 등 실존 작가 이야기에 상상력 더한 ‘팩션’ 뮤지컬
무대 위 한옥, 재즈풍 작곡… 경성 모더니즘 느낌 물씬

분명 팬레터를 보냈는데 상대가 러브레터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뮤지컬 ‘팬레터’에서는 팬레터 하나로 사랑이 시작된다. 작가 지망생 세훈은 자신이 동경하던 천재 소설가 해진에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팬레터를 보낸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 편지만으로 히카루가 이제껏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자신의 슬픔마저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 여긴 해진은 만나본 적도 없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세훈은 해진이 실망하지 않도록 사랑의 메신저를 자처해 계속 히카루로서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극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작가 이상, 김유정 등 그 시절 최고의 문인을 모티브로 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강점 아래 예술가의 치열한 삶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그린다. 실존했던 순수 문학 단체 구인회를 본뜬 ‘칠인회’는 단 한 번도 일곱 명을 채운 적은 없지만 행운의 숫자 ‘럭키 세븐’을 외치며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순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다. 실화에 상상을 더한 ‘팩션(Faction)’ 뮤지컬로 실제 문인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 만큼 곳곳에서 당대의 문학을 만나볼 수 있으며, 김유정의 미완 소설 ‘생의 반려’는 작품의 서사를 관통하는 넘버로 등장하기도 한다.
무대 위 자리잡은 고즈넉한 한옥과 재즈풍의 음악은 관객을 모더니즘으로 물든 경성으로 데려간다. 문학과 해진에 대한 세훈의 열망을 대변하듯 창호지 너머 그림자로 너울거리던 히카루는 세훈의 펜 끝에서 실체를 갖는 순간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히카루가 등장할 때면 무대 위에는 조명을 통해 원고지가 그려지고, 세훈이 당당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히카루는 해진에게도 뮤즈와 같은 존재가 된다. 연서가 문학으로 남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처럼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 글자로 지어진 견고한 성에서 셋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는다.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넘버 ‘섬세한 팬레터’에 맞춰 세훈과 해진, 히카루가 함께 추는 왈츠는 이들의 관계가 더 이상 쉽게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해진을 위해 시작한 세훈의 하얀 거짓말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새하얀 원고지 위 붉은 칸처럼 모두의 삶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해진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세훈이 창조해낸 히카루가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해진의 삶을 망가트리는 파괴적인 뮤즈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소산물에 불과한 히카루가 세훈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모습은 세훈과 히카루의 관계에 있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히카루로 분하는 배우는 의상을 갈아입는 것은 물론 목소리와 손짓 등 사소한 부분까지 변화를 주는데, 이는 관객이 극장을 여러 번 찾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칠인회마저 위험에 빠트리며 끝내 파국에 치닫자 절망에 빠져 힘겨워하는 어리숙한 세훈에게 다수가 동정하지만,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며 냉정함을 유지하던 관객도 칠인회 작가들이 세훈을 용서하는 모습에는 눈가를 적실 수밖에 없다.
201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에 선정돼 제작된 ‘팬레터’는 작년 창작 뮤지컬로서는 최초로 대만에 진출해 한국 뮤지컬의 저력을 보여줬다. 세 번째를 맞는 이번 공연에서는 재연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어와 일본어 자막이 제공된다. 우리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국뿐만 아니라 타국 대중의 이목까지 사로잡은 것은 팬레터를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는 독특한 이야기로 사랑과 자유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내년 2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