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루샤에게서 좋은 기운 얻어가세요”

입력 : 2019.11.15 15:19

[뮤지컬배우 이아진]
“꿈과 행복 주는 배우 되고파”
제루샤와 함께 성장… 16년차 배우의 첫 성인 배역 도전
뮤지컬 ‘키다리아저씨’ 제루샤役, 고아 소녀에서 독립적인 여성으로

제루샤 배역에 비슷한 연령대의 배우가 캐스팅 된 것은 처음이다. 이아진 또한 ‘키다리 아저씨’를 계기로 고등학생 역할에서 벗어나 성인을 연기하게 됐다. /달컴퍼니
제루샤 배역에 비슷한 연령대의 배우가 캐스팅 된 것은 처음이다. 이아진 또한 ‘키다리 아저씨’를 계기로 고등학생 역할에서 벗어나 성인을 연기하게 됐다. /달컴퍼니
 
2016년 초연 이후 매해 극장가로 돌아오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가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을 넷이나 데려왔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제루샤 애봇’으로 새로 합류한 이아진(24)이다. 극중 대학생인 제루샤와 마찬가지로 실제 대학 졸업을 앞두기도 했고 관람객들 사이에선 분장이 필요 없을 만큼 배역에 꼭 맞는 이미지라는 평이 자자하다.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 같지만 본인은 오히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단다. “첫 공연 전까지만 해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됐죠. ‘키다리 아저씨’가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만큼 관객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제루샤가 있을 테니까요.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거짓말처럼 걱정이 싹 사라지고 무대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어요. 객석에서의 따뜻한 눈길이 느껴지던 걸요?”
 
그래도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아 소녀가 익명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해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작가로 등단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키다리 아저씨’의 핵심은 바로 성장이다. 4년 동안 온갖 시련을 겪으며 제루샤가 변해가는 과정을 2시간 만에 보여주기란 배우에게 가장 큰 숙제일 터. 극이 진행될수록 제루샤의 목소리는 성숙해지고, 행동 하나하나도 미묘하게 변한다. “고아원에서 처음 편지를 받는 장면에서는 터벅터벅 걸어가서 의자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지도 않고 털썩 앉아요. 교육되지 않은 모습인 거죠. 대학에서 친구를 만나고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서 걸음걸이를 비롯해 행동거지가 점차 차분해져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성장을 이러한 변화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제루샤에 함께 캐스팅 된 다른 배우가 1막에서의 어린 제루샤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할 때, 이아진은 2막에서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방법을 탐구했다고 한다. /달컴퍼니
제루샤에 함께 캐스팅 된 다른 배우가 1막에서의 어린 제루샤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할 때, 이아진은 2막에서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방법을 탐구했다고 한다. /달컴퍼니
 
퇴장도 없이 두 배우의 호흡만으로 진행되는 만큼 많은 양의 대사와 노래를 소화해야 하는 와중에 무거운 가방도 수없이 나르고 옷도 몇 번을 갈아입는다. ‘극한 직업’에 가까워 보이는 배역을 연기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든지 물으니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루샤에게서 분리될 수 없는 거요. 연기하면서도 저 또한 제루샤의 말과 노래에 위로 받을 때가 많거든요. 인간 이아진으로서 말예요. 가끔은 툭 던지는 제루샤의 대사 한 마디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도 있어요.” 하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극의 형식상 한 감정에 오래 젖어 있을 수 없다. 2막은 3년이라는 시간을 담고 있어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사건 사고도 많아 두 인물의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친다. 새로운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에 맞춰 다른 감정으로 연기할 수 있도록 공연 직전까지도 대본을 보면서 편지 간의 날짜 간격을 숙지한다.
 
‘키다리 아저씨’를 동화로만 읽었다면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꿈을 펼쳐나가고 결국 그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정도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제루샤는 여성 참정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열악한 고아원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극중 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죠. ‘만약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진다면 저는 아주 훌륭한 유권자가 될 것 같지 않나요? 이 나라는 정말 낭비가 심한 것 같아요. 이렇게 정직하고, 교육 수준 높고, 양심적이고, 지적인 시민에게 참정권을 안 주다니.’ 1908년,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이전에 이런 여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매번 감탄하게 돼요. 제루샤가 하는 말에 오늘날의 관객도 공감을 표하죠. 제루샤가 오랜 기간 사랑받는 이유일 거예요. 저도 제루샤를 사랑하는 만큼 온전히 잘 표현해 내고 싶어요.” 극은 제루샤의 성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키다리 아저씨인 ‘제르비스 펜들턴’도 이를 지켜보며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해낸다. 서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둘을 응원하던 관객은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깊은 위로를 받는다.
 
‘키다리 아저씨’를 통해 성장한 것은 제루샤와 제르비스뿐만이 아니다. ‘번지점프를 하다’ ‘영웅’ ‘그날들’ 등 다수의 작품을 해왔지만 10대 배역을 벗어난 적 없던 이아진은 이 작품을 계기로 교복을 벗고 성인을 연기하게 됐다. 배우로서가 아닌 관객으로서 ‘키다리 아저씨’를 처음 만난 그는 행복을 전하는 따뜻한 극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언젠가는 저도 제루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바로 다음 해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가방에 악보와 대본이 있는 것도, 제루샤라고 불리는 것도 아직은 꿈만 같아요.”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문을 두드린 ‘키다리 아저씨’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졸업도 맞이해 그의 삶에 있어 더욱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원제는 다리가 긴 장님거미를 뜻하는 ‘대디 롱 레그스(Daddy-Long-Legs)’다. 제루샤는 락 윌로우 농장의 다락에서 우연히 장님거미를 발견하고는 얼굴도 모르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기분에 반가워하며 행복의 비밀을 노래한다. /달컴퍼니
작품의 원제는 다리가 긴 장님거미를 뜻하는 ‘대디 롱 레그스(Daddy-Long-Legs)’다. 제루샤는 락 윌로우 농장의 다락에서 우연히 장님거미를 발견하고는 얼굴도 모르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기분에 반가워하며 행복의 비밀을 노래한다. /달컴퍼니
 
이씨의 이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번 공연이 데뷔작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올해 배우 경력 16년차다.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아버지 이정열 배우의 영향으로 뮤지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9살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후회한 적 없어요. 제 꿈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제가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했어요. 지금은 무대에 서는 게 가장 좋아요. 시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하거든요.” 배우로서의 목표도 평범하지 않다. “꿈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가 무대를 보고 꿈을 가졌듯 꼭 배우라는 꿈이 아니더라도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연기와 공연에서 좋은 에너지를 듬뿍 받아 갔으면 해요.”
 
‘힐링’ 뮤지컬이라고도 알려진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가장 사랑받는 넘버는 ‘행복의 비밀’이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진부한 메시지도 제루샤의 입을 거치면 남다른 힘을 가진다. ‘행복의 비밀은 현재를 살기’라는 노랫말은 이 넘버를 부르는 이아진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현재를 사는 게 정말 중요한데, 지금 이 순간을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데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무대 위에서 ‘행복의 비밀’을 부를 때 최대한 관객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춘다. “저는 관객이 이 작품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힘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루샤로서 행복을 노래하는 이아진은 무대 아래에서도 자신과 타인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객석에 앉아있던 그가 제루샤로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내년 1월 1일까지 드림아트센터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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