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0.25 17:51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현대적 각색·실험적 형식 더해진 감각적 무대
이자람, 김주원, 이지나, 정재일 등 스타 예술가 한자리에
뮤지컬배우 마이클리, 강필석, 김태한이 무대에 올라 연기와 노래를 하고 정작 소리꾼 이자람은 노래 한 곡 하지 않는다. 발레리나 김주원은 유연한 몸짓을 뽐내면서도 발레는 하지 않는다. 정상급 예술인들이 주전공을 살리지 않는 특이한 공연, 바로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다. 연출가 이지나, 작곡가 정재일, 안무 감독 김보라, 무대 미술가 여신동까지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창작자들이 뭉친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다. 극본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타 뮤지컬이나 연극과는 달리 음악과 안무, 영상이 보조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대사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3년 전 개막했던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를 작업했던 이지나는 이번에도 다시 연출을 맡았다. 뮤지컬에서는 원작에 따라 음악과 무대를 통해 19세기를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면, 총체극은 21세기의 도리안 그레이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출발한다. 각색 과정에서 등장인물의 직업이나 특성은 물론 이름에까지 변화를 줬다. 원작 속 미학자 ‘헨리’는 유명 천재 작가를 발굴해내는 문화예술계 큰손 ‘오스카’로, 매혹적인 외양의 ‘도리안’은 잠재력을 지닌 신인 조각가 ‘제이드’로, 문제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배질’은 돈과 명예보다는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는 예술가 ‘유진’으로 각각 바뀌었다.
아름다운 도리안이 초상화와 영혼이 바뀌어 늙지도 추해지지도 않는 기이한 이야기 대신, 극은 재능 있는 예술가가 ‘도리안 그레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겪는 일련의 사건을 나열한다. 유진이 제이드를 모델로 한 포토콜라주를 선보인 것을 계기로 오스카는 제이드에게서 비범함을 느껴 자신의 ‘도리안 그레이’가 될 것을 제안한다. 제이드는 오스카의 공격적인 전략 아래 세계적인 예술가로 거듭나지만 머지않아 광기와 우울을 오가는 양극성 장애로 고통 받는다.
극은 원작이 지닌 비현실적인 지점을 전부 제거한다. 예컨대 유진이 작업한 포토콜라주는 제이드 대신 늙고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치 못한 제이드의 정신 상태로 인해 달리 보인다. 오스카는 제이드의 외모에만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통찰력으로 제이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광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만든다. 유진은 마약에 손을 대는 제이드에게 회개를 종용하는 대신 병원에 데려가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정재일은 관객이 제이드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따라갈 수 있도록 음악적 지표를 마련했다. 제이드가 평온하거나 우울할 때는 현악기 위주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르고, 광기에 휩싸일 때면 스피커를 찢을 것만 같은 강렬한 전자 댄스 음악(EDM)이 울린다. 무대 뒤편에 보이는 영상은 서사를 설명하기보다는 감각적 이미지가 추상적으로 담겨 제이드의 감정과 극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관객에게 문제의 포토콜라주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람들이 작품 속 제이드에 매료되는 모습은 강하게 내리쬐는 조명과 커튼에 의한 빛의 산란만으로 표현된다. 종종 천장에 등장하는 깨진 거울은 제이드의 눈에 포토콜라주 작품이 달라져 보이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제이드의 조각상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요소가 극본이 그저 기담으로 남지 않고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게 만든다.

원작은 세상에 나왔을 당시 불건전하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혹평을 받았다. 실제로 소설은 타락한 도리안이 쾌락을 좇다가 파멸하는 모습을 탐미주의를 내세워 전시한다.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유미주의가 잘 담겼으나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그 가치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워 아쉬움을 남긴다.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유려한 문체를 무대 위에 그려 내면서도 판타지를 현실적으로 각색해 원작이 지닌 아쉬움을 씻어낸다. 고전을 원작으로 하는 수많은 작품 중 새롭고 현대적인 재해석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11월 10일까지 유니플렉스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