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대는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입력 : 2019.10.22 17:35

[연극 킬롤로지]
세 인물 독백으로 구성… 잔인한 게임 따라한 살인 그려내
미디어와 폭력의 관계 너머 폭력의 근원 탐구

알란은 데이비에게 아홉 살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안겨주곤 말없이 떠났다. 이후 부자(父子)가 다시 만난 건 데이비의 장례식이었다. /연극열전
알란은 데이비에게 아홉 살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안겨주곤 말없이 떠났다. 이후 부자(父子)가 다시 만난 건 데이비의 장례식이었다. /연극열전
 
오로지 살인을 위한 게임, ‘킬롤로지’에서는 사람을 가장 창의적으로 죽이는 플레이어가 승자다. 총으로 심장을 명중하면 1점. 하지만 일부러 빗겨 쏴서 천천히 죽게 하면 100점이다. 도구는 다양하게 준비돼 있고 최대한 느리고 고통스럽게 죽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게임의 윤리성을 문제 삼는 우려의 목소리에 개발자 폴은 동의하지 않는다. 화면에서 눈을 떼면 점수가 깎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희생자에게 가하는 폭력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게임의 이름과 동명의 연극 ‘킬롤로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보복하려는 아버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알란의 아들 데이비는 킬롤로지에서 최고점을 얻을 수 있는 방식과 동일하게 살해됐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인을 꺼리지만, 그 반감에 무뎌지도록 학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란은 킬롤로지가 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폴은 킬롤로지는 게임에 불과하다고만 할 뿐 전혀 책임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게임에서 마법을 쓰면 돼지가 날아다니죠. 그렇다고 현실에서도 돼지가 날아다닌다고 생각합니까? 무슨 바보 천치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킬롤로지의 폭력성과 데이비의 죽음을 목도한 관객으로서는 폴의 말에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알란은 킬롤로지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자신의 아들 데이비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폴이 보게 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연극열전
알란은 킬롤로지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자신의 아들 데이비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폴이 보게 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연극열전
 
예술과 게임의 폭력성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으로 시작된 논의는 폭력 그 자체의 원인까지 파고든다. 무엇이 폴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만들게 했을까. 폴은 돈 많은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게 쉽지 않았다. 가벼운 칭찬조차 건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폴이 킬롤로지를 개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폴과 달리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 없이 자란 데이비는 어머니는 물론 학교로부터도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교 선배들로부터 괴롭힘 당할 때조차 도움을 청할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안전장치를 보장받지 못한 채 정서적으로 부모의 보호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은 가해자이자 또 피해자로 성장했다.
 
극은 세 인물의 독백만으로 진행되는데, 동떨어진 이야기를 각자 주절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퍼즐 조각이 맞춰지며 서로의 연결고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 구분도 없이 단순하게 구성된 계단식 무대 위에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소품은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전부다. 간소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독백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독백하는 배우에게만 집중되는 조명과 분위기를 장악하는 효과음과 음악이 관객의 상상력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함께 넘나들며 관객은 자꾸만 행복할 수 있었던 날을 그려보게 된다. 알란이 데이비와의 연을 끊지 않았더라면, 폴의 아버지가 아들을 한 번만 감싸 안아 줬더라면, 데이비의 어머니가 아들을 향해 한 번만 웃어줬더라면.
 
극은 잔혹한 범죄와 미디어의 상관관계, 그리고 폭력의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며 가깝게는 가정, 교육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체계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관심과 애정의 결핍이 낳은 킬롤로지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초래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만 같다. 그러나 새까만 밤하늘도 사실은 빛나는 별로 가득하다는 극중 대사처럼, 어둠이 물러갈 그날까지 ‘킬롤로지’는 이 사회에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당신은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11월 1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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