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0.18 11:13
악의 근원 파헤치는 판타지·범죄·추리 뮤지컬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법칙을 설명해 인간을 성서 속 원죄로부터 해방했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과정에서 악(惡)이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인간의 원죄를 새롭게 정의한다.
극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는 열여섯 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여느 십 대가 겪는 성장통을 다루기보다는 무거운 진실을 마주한 소년의 불가피한 선택을 보여준다. 1지구, 2지구와 같이 생소한 구획을 경계로 하는 철저한 계급 사회 하에서 다윈과 루미, 레오는 1지구의 유서 깊은 명문 학교 프라임스쿨에 나란히 입학한다. 다윈은 프라임스쿨 운영위원장이자 교육부 장관인 니스의 아들로 자타공인 모범생이지만, 오래된 물건을 교환하는 교내 행사에서 9지구 폭도의 상징인 ‘후디’ 옷을 가져와 문제를 빚는다. 그의 단짝 친구 레오는 9지구를 앵글에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아버지 버즈를 따라 1지구를 비판하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루미는 천재 소년이었던 삼촌 제이를 동경해 그가 30년 전 9지구 폭도에 의해 살해된 미제 사건을 직접 해결하려 한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의 골자를 지녔지만 진실이 밝혀지면서 긴장이 해소되기는커녕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루미를 도와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존경하던 아버지의 추한 면을 맞닥뜨린 다윈은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혼란에 휩싸인다. 니스가 자신의 아버지 러너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듯이, 결국 다윈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원죄를 대속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레오를 죽이기에 이른다. 계급이 낳은 악은 대물림되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이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거두게 만드는 건 박천휘의 작곡이다. 죄를 범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감싸려던 넘버 ‘사랑해야만 한다’를 대신해 새로 추가된 ‘밤이 없었다면’은 악의 기원을 개인이 아닌 사회로 돌려, 갈등하던 다윈이 끝내 악을 선택하는 과정을 더욱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러너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친구를 죽인 니스와, 그 죄를 덮기 위해 레오를 죽이는 다윈이 함께 등장해 처절하게 절규하는 모습에 관객은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옛 수도원을 재건축해 기숙학교를 짓고, 휴대전화조차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관은 절묘하게 우리 사회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상위 계층에 의해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하위 계층의 혁명이 역사에 폭동으로 기록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씁쓸해진다. 가족 간의 사랑이 숭고하게 표현되면서도 올가미가 되어 돌아오는 것 또한 팔이 자꾸만 안으로 굽는 한국 사회를 반추하게 만든다.
850쪽에 달하는 박지리 작가의 원작을 약 두 시간 반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이희준 작가는 추리보다는 러너·니스·다윈 삼대에 걸친 죄의 굴레에 집중했다. 군무가 돋보이던 서울예술단의 타 작품과는 달리 서사의 전달에 치중해 무게감 있게 진행되면서, 선과 악, 죄와 벌, 가족의 생존에 대한 묵직한 질문이 관객 앞으로 던져진다. “당신은 부모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가.” 27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