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너와 나, 같은 사건을 왜 다르게 기억할까?

입력 : 2019.10.14 16:14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뒤틀린 시간, 왜곡된 기억… “열린 결말 아닌 열린 생각”
기울어진 무대 위 배회하는 몸짓으로 해체된 시공간 표현

영훈의 모친은 남자를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라 말하며 보살피는 척 하지만 실은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남자의 삶을 망치려 한다. /서울문화재단
영훈의 모친은 남자를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라 말하며 보살피는 척 하지만 실은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남자의 삶을 망치려 한다. /서울문화재단
 
인간은 현재를 살며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대비한다. 마블 코믹스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닌 이상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앞당길 수도 없는 법. 그러나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속 남자 주인공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 그믐날 날아 들어온 ‘우주알’이 남자의 시간을 뒤틀어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살게 된 남자에게는 과거를 잊을 일도 없거니와 예측 불가능한 미래도 없다. 모르는 것 없는 인생이 마냥 좋아 보일 수 있지만, 학창 시절 동급생 영훈을 살해한 죄로 9년간 복역한 남자의 삶은 죄책감으로 가득하다. 동창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우주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투고하면서 둘은 재회하고 남자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영훈의 어머니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의 대인관계는 물론 사회생활까지 전부 방해하고 다닌다. 자신의 아들을 학교 폭력 가해자로 만들어 버린 남자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극은 살인, 학교폭력, 스토킹을 비롯해 범죄자에게 찍힌 낙인과 피해자의 상처 등을 바탕으로 기억의 신빙성과 왜곡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남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조금씩 달라지며 여러 번 반복되고, 여자 역의 배우가 바뀌면서 남자가 말한 버스 노선처럼 내용이 두 갈래로 나뉘는 등 극이 진행될수록 진실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순서가 뒤죽박죽인 책을 읽는 듯 해체된 시공간 속에서 관객은 파편화된 세 인물의 서사를 마주한다. 특히 액자식 구성으로 남자의 소설 ‘우주알 이야기’까지 더해짐으로써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보다는 왜곡된 기억과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속되는 고통에 집중하고자 한다.
 
달을 닮은 원형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신체행동연기’를 통해 계속되는 현재를 표현한다. /서울문화재단
달을 닮은 원형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신체행동연기’를 통해 계속되는 현재를 표현한다. /서울문화재단
 
기울어진 원형 무대 두 개가 맞붙은 모습은 지구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달 혹은 ‘우주알’이 떠돌던 우주를 연상한다. 배우들은 균형이 무너진 채로 발작하듯 끊임없이 돌고 도는 몸짓을 통해 계속되는 현재를 표현한다. 전형을 벗어난 연기 방식은 관객이 이질감을 느끼게 하면서 무대에 집중하게 만든다. 매 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남자와 조각난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방식인 셈. 몸짓만으로 인물과 장면을 묘사해 관객이 상상을 통해 빈 공간을 채우게 만드는 강량원 극단 동 연출이 고안해낸 ‘신체행동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장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작년 초연 후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우리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나 뉴스에서 소식을 접할 때도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따진다. 인간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순서가 뒤섞여 실험적으로 전개되는 극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극장을 나선 후에도 퍼즐 조각 맞추듯 내용을 곱씹게 만들어 관객을 기억과 시간, 고통과 속죄에 대한 고찰로 이끈다. 강 연출은 작품 속 대사인 ‘과거로부터 널 지켜줄게’를 인용하며 “이 작품이 기억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덜어주는 공연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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