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을 담다보니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기분"

입력 : 2017.09.20 03:07   |   수정 : 2017.09.20 10:06

[민족운동가 故 정세권의 손녀 정희선 교수 '북촌 사진展' 열어]

건축가 할아버지가 일제 때 만든 북촌한옥마을 누비며 곳곳 촬영
"집 없는 조선인 살 곳 마련 위해 소규모로 밀집해 설계하신 것"

"할아버지는 밖에선 큰일을 하셨지만 집에서는 자상하셨어요.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손편지를 쓰실 정도였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만드신 북촌을 거닐면 지금도 내 집처럼 친근하게 느껴져요."

정희선(70) 덕성여대 명예교수(경영학과)는 건축가 정세권(1888~1965)의 손녀다. 정세권은 1920년대 일제의 도시 개발 정책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울 북촌과 성북동, 왕십리 등 토지를 매입하고 한옥 단지를 지은 인물. 신간회와 조선어학회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할아버지가 만든 북촌 한옥마을을 카메라에 담아 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성당 갤러리 1898에서 사진전을 연다.

정희선 덕성여대 명예교수가 그의 조부 정세권 건축가가 만든 북촌 한옥마을에 섰다. /이태경 기자
정희선 덕성여대 명예교수가 그의 조부 정세권 건축가가 만든 북촌 한옥마을에 섰다. /이태경 기자
정세권 선생 셋째 아들의 딸인 정 교수가 북촌 사진을 찍기로 결심한 것은 최근 언론에서 정세권을 민족운동가로 활발히 조명했기 때문이다. "전에도 할아버지가 북촌을 만든 사실은 알았지만 일반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한옥 거리' 정도로만 생각했죠. 6·25 전쟁 당시 할아버지와 서울에서 함께 살았는데도 할아버지가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웠습니다."

정 교수는 카메라를 들고 북촌을 샅샅이 훑었다. 6년 전 퇴임 후 시작한 사진 촬영 취미가 쓸모 있었다. 모르는 집 문을 두드려 촬영 허락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주인들에게 면박당하기 일쑤였죠. 문 두드리기 미안해 대문 밖에서 30분 넘게 기다리다가 배달원 뒤따라 들어가 허락받은 날도 있었어요."

그렇게 꼬박 1년간 북촌을 누볐지만 지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고 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제가 할아버지께 말을 걸고 있더군요. '할아버지, 이 집은 왜 작게 지으셨어요?' '지붕들은 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할아버지와 손잡고 함께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 교수의 한옥 사진 중에는 유독 독특한 구도가 눈에 띈다. 지붕과 처마 선이 하늘과 맞닿으면서 'ㅁ' 'ㄷ' 'ㅅ' 같은 모양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느 날 한옥집에 들어가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데 마치 하늘이 지붕 사이에 갇힌 것처럼 보였어요. 소규모로 밀집된 한옥 단지를 조성하다 보니 지붕끼리 서로 가까이 붙어 있게 된 것이죠. 넓은 평수 한옥이었다면 이런 모양은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집 없는 조선인들을 위해 개량 한옥을 한 채라도 더 보급하려 했던 할아버지 건축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구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정 교수는 이번 기회에 북촌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사진전이 마무리되면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 촬영에도 나설 계획이다. 그곳 역시 정세권 선생이 1920~30년대 도시형 한옥마을로 개발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바라보실 생각을 하면 더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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