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양준모·전나영, 가뜩이나 무거운 뮤지컬 더욱 숭고하게

입력 : 2015.10.06 10:07
공연은 때론 누군가에게 신념이다. 무대 위에서 신성한 노동을 하듯 정성껏 연기하는 양준모(35)가 굵은 음성으로 온갖 힘을 다해 '장 발장'에 대해 말할 때, 여인과 소녀 사이를 오가는 전나영(26)이 '판틴'의 캐릭터를 설명하다가 시리아 난민 이야기 도중 눈가가 촉촉해질 때 그걸 느꼈다.

2년 전 27년 만에 한국어 라이선스로 처음 선보인 뮤지컬 '레 미제라블' 재공연에 캐스팅된 장발장 양준모·판틴 전나영은 이 공연을 '굳게 믿는 마음'을 내내 지켰다.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85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후 '캣츠'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손꼽힌다.

양준모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옥살이를 한 뒤 은촛대를 훔친 자신을 용서해준 주교로 인해 삶이 바뀐 장발장이다. 전나영은 장발장이 자신도 모르게 외면해 위험에 빠뜨린 '판틴'을 연기한다. 연약해보이나 자신의 딸이자 훗날 장발장의 수양딸로 들어가는 '코제트'를 위해서는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한다.

양준모는 2007년 예정됐던 '레 미제라블' 한국 라이선스 공연의 장발장 역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다가 이 작품이 무산되면서 불발됐다. 하지만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일본 도호 프로덕션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으로 열연하며 꿈을 이뤘고 마침내 한국 무대에 같은 역으로 오르게 됐다. 2013년 뮤지컬 '드라큘라' 이후 2년 만에 한국 무대에 서는 그는 "12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한 것이 장발장 역에 대한 준비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하다"고 눈을 빛냈다.

오페라에서 바리톤으로 활약한 양준모는 '스위니 토드'에서 엽기적인 살인을 일삼는 '스위니 토드', '이블 데드'에서 우스꽝스러운 '제이크', '오페라의 유령'에서 한 여인을 짝사랑하는 '팬텀', '영웅'에서 나라를 위해 총탄을 쏘는 안중근 장군, '지킬 앤 하이드'에서 선악을 오가는 '지킬'과 '하이드' 등 다양한 역을 오갔다.

"어렸을 때부터 나이 든 역도 많이 하고, 강한 캐릭터도 많이 했는데 모든 게 다 장발장 연기를 위해 중요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네덜란드 태생 교포 3세인 전나영은 2013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레 미제라블'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판틴 역을 맡은 주인공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 '킴'을 연기한 바 있다. 그룹 'AOA' 설현과 미스코리아 출신 이하늬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전나영은 한국 무대에서 데뷔한다는 설렘에 눈빛이 총총했다.

그녀가 '레 미제라블'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2012년. 한국에서 공연할 '레 미제라블'의 코제트 역을 위해 당시 영국에서 치러진 오디션에서 한국어로 노래했는데 뽑히지 못했다. 이후 영국 '레 미제라블'에서 '에포닌'을 연기하려고 오디션을 치렀는데 마지막 오디션에서 뮤지컬 프로듀서인 캐머런 매킨토시가 판틴의 그 유명한 넘버 '아이 드림드 어 드림'을 불러보라고 제안하면서 이 역을 따냈다. 당시 연출자는 세 명이었다. 한국 '레 미제라블' 초연의 연출자 로런스 코너가 그 중 한명이었다. 그가 한국 제작사인 KCMI에 전나영을 소개시켜줬고, 그녀가 올해 1월 한국에서 오디션을 본 뒤 한국 재공연 판틴으로 우뚝 서게 됐다.

할아버지가 네달란드 한국 대사관에서 운전기사로 일하게 되면서 현지에 정착한 전나영의 가족은 평범한 한국 가정이었다. 엄격한 한국 부모로 인해 어릴 때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다른 친구들을 보며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하지만 한국의 친척 집을 오가면서 불교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 문화에 점점 익숙해졌다. 2010년 홀로 한국 여행을 한 뒤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아직 깊은 속마음을 꺼내기 위한 한국어에는 서툴지만, 네덜란드어뿐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에도 능통한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현명했다.

양준모는 무엇보다 '레 미제라블'이 신앙적인 면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인만큼 "장발장은 신을 원망하고 자신에게 왜 이런 시련을 줬는가라고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라고 느낀다. 내 인생에도 그런 경험이 있어 장발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독교를 거의 믿지 않은 일본 공연 당시에는 주교 역을 맡은 배우를 교회로 데리고 가 목사와 대화를 나누게 만들기도 했다고 웃었다. "이런 경험은 '영웅' 이후 처음이다. 캐릭터의 감정을 느끼는 것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했던 나이와 사형당하던 나이가 나랑 같았다. 지금은 장발장의 여정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다."

결혼 7년 만인 최근 첫 딸을 얻었다. 인생 후반부를 양딸인 코제트를 위해서만 사는 장발장의 심정을 더 이해할 법하다. "이제 한달이 됐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출생 신고도 못했는데 신기하더라. 아직 낯설어서 크게 감정 이입을 할 지점을 찾지 못했지만,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려오는 순간 그의 인생이 바뀌었는데 딸을 보면서 인생의 중심이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레 미제라블'에 출연한다는 건 "삶의 전반이 바뀌는 것"이라고 크게 의미를 뒀다. "장발장의 인생은 주교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주교를 만난 뒤 많은 일을 행하는데 그것들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 아니나 일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처럼 연기하는 것"이 목표다.

전나영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왜냐하면 '레미제라블' 속 인물들은 각자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인데 다들 자신의 것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절박함이 느껴진다"고 수용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 미리 접한 전나영의 판틴 음성은 강하지만 어딘가 여린, 상상 속 판틴의 모습에 오롯이 가닿았다. 전나영은 판틴을 "매우 어리고 순진하다.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고 해석했다. "장발장도 코제트만 보고 살듯 판틴도 그런데 그녀는 아직 애다. 그래서 음색도 여리게 내려고 했다. 판틴은 마치 옆에서 지켜보며 계속 챙겨주고 싶은 동생 같은 캐릭터로 해석했다.

양준모은 "일본에서도 여러 판틴을 봤는데 나이가 있고 음색이 정해져 있다. 그들에 비해 어린 나영이를 보니까 정말 판틴의 캐릭터가 이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 치켜세웠다.

전나영도 "준모 오빠가 하는 연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국에서 커버까지 5명의 장발장을 봤는데 진짜 야생의, 짐승같은 장발장을 보여주더라. 나도 거기서 영감을 받고 더 열정이 생겼다"고 화답했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사람들은 맞서 싸우는 캐릭터다. 포기하지 않고 자기 연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 그것을 몸 전체로 연기하는 걸 보고 놀랐다."

전나영은 그래서 '레미제라블'은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석했다. "실제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이런 상황을 접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알면서도 눈감는 경우도 많다."

한국말로 '레미제라블'을 연기하다 보니 영어로 연기할 때 느끼지 못한 걸을 깨닫는다. 극중 프랑스혁명 당시 바리케이드가 무너질 때 민중들이 부르는 넘버 '터닝'을 한국에서는 '흘러흘러'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흘러흘러 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바리케이드가 무너진 뒤 민중들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부르는 넘버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얻기 위해 싸웠나라고 노래하는 부분인데 한국어 공연에서 연습 도중 영어 공연 당시 듣지 못했던 꼬마애의 '빨리 깨워'라는 소리가 들리더라. 엄마는 깨울 수 없어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것의 시리아 난민들이었다. 바다에 (죽은 채) 누워 있어 빨리 깨우면 정말 일어날 것 같은 아이를 뉴스에서 봤는데 계속 생각나더라. '레 미제라블'을 통해 우리가 깨울 수 있는 친구들을 위해 이야기를 하고,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슬픈 세 시간(러닝타임)이지만 그 누구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이 보인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양준모는 "'레미제라블'을 하는 배우들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알고 있다"며 "우리 해야 할 숙제는 그렇게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일본에서 '레미제라블' 공연 당시 길가에서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 계속 후회가 됐다."

지난달 초 제대로 대면한 두 사람은 몇십년 동안 애정을 키운 사이 좋은 남매 같았다. 네 살 때 '서편제'를 본 뒤 감동을 받고 아리랑을 따라하면서 자연스레 이쪽 꿈을 키웠다는 전나영은 양준모가 뮤지컬 '서편제'에 출연한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신나했다.

전나영은 "당시 꼬마 나영이가 '서편제'를 보고 무엇을 이해했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부터 한국적인 한이 배어서 그간 한국무대에 서고 싶었던 것 같다"며 "이번 무대에서 그걸 공유하고 싶다"는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TV에서 교육프로그램과 시트콤에도 출연한 그녀는 "한국에서도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바랐다.

지난해 양준모가 연출하고 '도니제티'로 출연해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오페라 '리타'는 초연의 호응에 힘 입어 재공연(11월 10~15일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을 앞두고 있다. 양준모는 이번에는 연출만 맡고 '레미제라블'에 주력하고 있다.

연출가를 포함해 자신이 맡은 역에 따라 작품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는 그는 "어릴 때는 자신이 중심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지금은 자기가 해야할 선에서 해야 할 것이 먼저다. 주인공이라서 더 해야지가 아니라 내가 할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1월28일부터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서울 공연에 앞서 10월21일부터 11월15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장발장 정성화·양준모, 판틴 조정은·전나영, 자베르 김준현·김우형, 에포닌 박지연, 마담 떼나르디에 박준면, 떼나르디 임기홍, 앙졸라 민우혁, 마리우스 윤소호, 코제트 이하경. 6만~14만원. 러닝타임 총 180분(인터미션 20분). 레미제라블코리아·인터파크씨어터·KCMI. 02-547-5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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