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비보잉에 심취해 있거나 미스터 선발대회에 나가기도 했던 그는 이제 클림트에서 베토벤이 들린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별 보아의 큰오빠이기도 한, 한국의 류이치 사카모토를 꿈꾸는 권순훤이다.

피아니스트 권순훤. 그가 발매한 음반은 무려 34장, 정식 공연만 100회 이상이다. 그의 공연은 늘 매진이고, 음반 역시 꽤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이 대단한 피아니스트는 사실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었다. 비범한 형제들로 인해서다. 남동생은 걸스데이의 ‘반짝반짝’, 백아연의 ‘어 굿 보이’ 등으로 유명한, 요즘 한창 잘나가는 뮤직비디오 감독 권순욱이고, 게다가 여동생은 ‘아시아의 별’ 보아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보아 오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제겐 양날의 검 같아요. 그 수식어 덕분에 단시간에 알려질 수 있었지만, 열심히 해도 ‘보아 오빠’거든요. 제 노력이 그 수식어에 가려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10년 넘게 보아 오빠로 살다 보니 받아들이게 됐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 학생, 서울음대에 입성까지
권순훤은 요즘 <구스타프 클림트展>의 인기에 따라 또 한 번 주목받고 있다. 그가 출간한 책 <나는 클림트를 보면 베토벤이 들린다>로 인해서다. 그는 클림트 그림에서 베토벤과 브람스의 음악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말한다.
“저도 클림트를 좋아해요. 제가 예전에 좋아했던 여성이 있는데, 그 친구가 클림트의 작품을 좋아했죠.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품 ‘키스’를 보면 여성의 얼굴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그림 속 여성은 입이 아닌 볼에 키스를 받고 있고 게다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낭떠러지예요.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거든요. 두 사람은 평생 정신적인 반려자로 살아갔고, 클림트가 죽어갈 때 그녀를 찾았다고 해요. 이 그림에서 저는 베토벤의 <월광>을 떠올렸어요.”
권순훤은 클림트 ‘키스’ 이야기를 하면서 베토벤 <월광>을 치기 시작했다. 슬픔에 가득 찬 1악장, 격정적인 분노로 치닫는 3악장. 베토벤은 당시 귀족 가문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 차이로 괴로워했고, 결국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미술 이야기도 술술 한다.
“미술과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면 관객 입장에서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련한 공연이 바로 ‘미술관에 간 피아니스트’였어요. 그게 반응을 얻어 책까지 출간하게 된 거죠.”
그의 공연은 늘 관객이 우선이다. 이런 생각은 피아니스트로서 남다른 출발과 과정을 밟아왔다는 데서 시작한다.
“제가 주류 쪽과 인연이 없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화예고, 서울대와 동 대학원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가, 주류가 아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음악을 업으로 삼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개 피아니스트들이 네댓 살에서 초등학생 사이 피아노를 시작해 전문 레슨을 받으며 예술중학교에 입학하며 꿈을 키워온 것을 생각한다면 많이 늦은 편이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녔어요. 그때 만나던 여자 친구가 공부를 잘했는데, 이 친구가 외고를 간다는 거예요. 저도 뭔가 보여줘야 해 예술고등학교 시험을 봤어요. 겁이 없어서 붙은 것 같아요. 구리시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내가 제일 잘 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입학해보니 갈 길이 멀었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 출신’ 권순훤에게 예술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등교하던 그와 달리 친구들은 외제차를 이용했다.
“예고에 들어가 보니 ‘누구 제자냐?’라는 것부터 물어보더라고요. 레퍼토리도 엄청 많았고요. 저는 입시곡 하나 치고 들어갔거든요. 그저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를 쳤어요. 집에서 당시 인기 있던 솔리드나 R.ef와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치면서 놀았고요. ‘너희 집엔 그랜드 피아노도 없냐?’는 친구의 말에는 열이 확 받아 공부로 제친 뒤 ‘너는 성적이 그것밖에 안 나왔냐’고 했던 적도 있네요.”
결국 뒤에서 5등이었던 그는 앞에서 5등까지 따라잡았다.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의지 덕분이었다.
권순훤은 “학원에서 오래 공부하다 보면 일반 관객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눈높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고집보다는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을 해왔다. 그가 발매한 음반 역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누구든 배우는 부르크뮐러나 체르니였다.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부르크뮐러나 체르니는 테이프나 CD도 없이 선생님이 쳐주시는 것밖에 없잖아요. 일종의 틈새시장이었죠.”
졸업 후 음반 제작으로 사업의 맛을 알기 시작할 때쯤 영국 왕립음악원 입학 허가를 받게 됐다. 음악학교로는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학교로, 당연히 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권순훤은 고민 끝에 유학을 포기했다.
“아버님은 완고하게 가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책임도 네가 져라’ 하는 식이었어요. 그 말씀이 제일 무서워요. 음악에 빠져 있다가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고민 끝에 유학을 포기했고 대신 한국에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사업을 했어요.”
원하는 걸 얻는 방법을 가르쳐준 어머니
권순훤, 권순욱, 권보아까지 세 아이를 예술가로 키워낸 어머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어머니 성영자 씨는 교육 자서전 <황금률>을 펴내고 삼남매 교육법으로 유명세를 탔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저희에게 무언가 먼저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셨지, 먼저 뭔가를 시키신 적이 없어요. 대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들어주셨고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셨죠. 예전에 제가 장난감 카메라가 갖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사주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열심히 읽고 독후감을 썼던 생각이 나요. 항상 뭔가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죠.”
어머니 성영자 씨는 때로는 아들을 위해 지나치게 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원 다닐 때 주얼리 브랜드 유통을 한 적이 있어요. 사업이 시작하자마자 잘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3일을 보시더니 ‘지하철에 가서라도 팔아라’고 하셨어요. 그만큼 굉장히 강하게 가르치셨죠. 그런 마음으로 하는 사업이었으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일주일부터 팔리기 시작해서 롯데에 입점시키게 됐죠. 지금은 접었지만요.”
서울예술종합학교 겸임 교수인 그는 최근 인터넷에서 ‘비보잉 교수’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는 과감하게 비보잉을 선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동생만큼이나 비보잉에 심취했을 때가 있었다.
“교수 장기 자랑 시간이었는데, 그중 제가 제일 어렸으니 어쩔 수 없이 나갔어요. 비보잉은 중고등학교 때 많이 했죠. 그 시절에는 여동생보다 남동생이 더 잘했어요. 순욱이는 헤드스핀을 한번 하면 3분을 했으니까요. 그때는 제가 비보잉으로 제일 밀렸죠. 그런데 여동생이 기획사에 들어가서는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더니, 남동생을 제치더라고요.”
청소년 시절 삼남매 모두 춤꾼이었던 셈이다. 춤 잘 추는 유전자라도 타고난 것일까?
“몸이 모두 건강해요. 어머니는 저희 삼남매가 집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못 보셨어요. ‘차라리 나가서 뭐라도 해라. 춤도 추고 운동도 하라’고 하셨어요. 그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정말 좋아했어요.”
피아니스트라면, 혹여나 손가락 다칠까 싶어 멀리하게 되는 운동도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미스터 서울 선발대회에까지 나갈 정도였다.
“대학교 4학년 때 미스터 서울 선발대회에서 본선까지 올라갔어요. 되게 웃겼던 게 등록할 때 주최측이 ‘정말 음대생이냐, 이 대회가 27회째인데 음대생은 처음’이라면서 놀라더라고요. 음대 친구들이 응원 와주고… 재미있었죠. 지금도 스노보드도 타고 골프도 치고 운동이라면 다 좋아요.”

동생 무대 보며 에너지 얻어
그의 책에 수록된 프로필 사진은 동생 권순욱 감독이 찍어준 것이다. 그동안 찍은 사진이 많지만 동생이 찍어준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제가 거침없이 쥐어짜거든요. 동생은 ‘인간아, 그만 좀 부려먹어라’ 하고요.(웃음) 남동생과는 연년생이라 친구 같은데 성향은 달라요. 아무래도 저는 클래식이 베이스인 데 비해, 동생은 뮤직비디오 자체가 대중음악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남동생과 여동생은 잘 통하죠.”
‘피아노 치는 오빠와 노래하는 동생’ 하면 집에서 오붓한 살롱 음악회를 상상할 수 있으나 분위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그럴 시간이 있었다면) 밖에 나가서 놀았겠죠. 동생이 작곡을 할 때 가끔 화음을 만들어준 적은 있어요. 피아노 치는 입장에서는 어쨌든 만들 수 있는데, 보통은 어려울 수 있거든요. 그렇게 가끔 티끌만 한 도움을 주기도 해요. 저는 동생의 공연을 보며 힘을 얻어요. 동생이 저 공연을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에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평소 일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서로서로 컬래버레이션 작업은 종종 하는 편이다. 권순욱 감독은 주로 보아의 뮤직비디오를 찍고, 권순훤과 보아는 피아노를 통해 협업한다.
“저는 여동생의 노래를 피아노 곡으로 만들어서 컬래버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동생의 노래를 피아노 곡으로 만들어줬죠. 두 동생은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컬래버를 하고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급이 맞아야 서로 도와요.(웃음) 어쨌든 저는 열심히 해야 해요.”
피아니스트로 음악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영역은 음악에서 또 다른 음악으로, 예술에서 또 다른 예술로 점점 더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권순훤의 꿈은 무엇일까?
“누군가 제 직업을 물어본다면 ‘그냥 권순훤이야’ 했으면 좋겠어요. 일본의 류이치 사카모토는 피아니스트이자, 모델 겸 배우, 영화음악 감독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냥 류이치 사카모토예요.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면서, ‘권순훤’ 이름으로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박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