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 안 풀리는 韓日관계, 음악으로 하나되다

입력 : 2013.11.19 00:39

[도쿄심포니와 협연한 백건우]

스케줄 꽉 찼지만 일부러 시간 내… 兩國연주인, 브람스 곡으로 하나 돼
"곧 일흔, 음악의 힘 보여주고 싶다"

지난 15일 오후 8시.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구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무대에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60대 신사가 섰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1500여명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그는 '건반 위의 순례자'로 불리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67)씨다.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 초청을 받은 백씨는 이날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제2번'으로 그들과 협연을 펼쳤다.

잠시 후 일본의 유명 지휘자 오토모 나오토(大友直人)씨의 지휘 아래 한·일 양국 음악가들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긴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듯 나지막하게 시작한 백씨의 피아노는 때로는 곱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콘서트홀에 울려 퍼졌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백씨의 피아노와 어울려 멋진 화음을 만들어냈다.

지난 15일 일본 도쿄 신주쿠의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피아노 앞에서 관객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지휘자 오토모 나오토씨가 그의 왼편에 선 채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지난 15일 일본 도쿄 신주쿠의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피아노 앞에서 관객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지휘자 오토모 나오토씨가 그의 왼편에 선 채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이들의 협연이 이어진 50분간 눈을 감거나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은 연주가 끝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큰 박수를 보냈다. 관객 무라타 후미코(46)씨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열정과 집중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양국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소리가 어디 하나 튀는 곳 없이 멋지게 조화를 이뤘다"고 했다.

백씨는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을 뒤로하고 환히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공연 스케줄이 1년 내내 꽉 차있지만, 최근 나빠진 한·일 관계 때문에 오히려 '꼭 이 무대만큼은 서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로 이뤄낼 수 없는 한·일 양국의 화합도 음악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모국인 한국만큼 일본 또한 소중한 곳이다. 10여년 전 처음 일본에서 공연을 한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본 무대에 서고 있다. 부인인 배우 윤정희(69)씨는 백씨의 '매니저'로 항상 따라나선다. 백씨는 "지금도 일본 관객들은 한국 피아니스트인 내 공연을 따라다니며 찾아주고, 팬레터도 보내줄 만큼 클래식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남다르다"고 했다. 얼마 전 도쿄에서 열린 그의 슈베르트 연주회는 NHK 방송을 앞두고 있다.

그만큼 일본에서 받은 사랑이 컸기에 최근 한·일 관계가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공연 일정을 조정해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섰다. 이들이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제2번'은 피아노 위주로 흐르는 많은 피아노협주곡과 달리 '교향곡'으로 오해받을 만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는 곡이다. 이날 공연을 찾은 우에노 쇼이치(上野尙一) 아사히신문 사주는 "양국 연주가들이 브람스의 곡으로 하나가 돼 무대 위에서 멋진 장면과 소리를 만들어줬다"고 했다.

백씨는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일본 음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면 그곳이 서울이든 부산이든 일본이든 관객들 표정에서 같은 설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나이 70을 바라보지만 이 손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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