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우스 거장'과 나흘 밤낮 모차르트를 만나다

입력 : 2013.10.16 23:32

[피아니스트 서혜경, 九旬의 지휘자 네빌 마리너와 음반 녹음]

세계 정상급 앙상블 ASMF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협연
11세때 국립극장 데뷔 曲 21번, 42년 만에 英 런던서 첫 녹음… 마리너 "또 협연하고 싶다"

런던 네빌 마리너 집에서 다음 날 있을 협주곡 녹음을 의논하고 있는 서혜경.
#런던 글로스터 로드, 마리너의 집

지하철 글로스터 로드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지휘자 네빌 마리너(Marriner) 아파트. 6일 오전 피아니스트 서혜경(53·경희대 교수)이 찾았다. 현관에 나온 구순(九旬)의 마에스트로가 2층 거실로 안내했다.

"1958년 동료와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SMF)'를 결성한 게 바로 여기예요. 앙상블 이름도 이 방에서 만들었어요." 정제된 사운드와 뛰어난 연주력으로 이름난 ASMF의 발상지.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 음악감독을 맡은 마리너는 ASMF와 함께 모차르트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창 쪽에 피아노가 한 대 있고,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은 10여명이 앉으면 꽉 찰 것 같은 방이다. 서혜경이 푸념 섞인 질문을 했다. "모차르트는 듣기는 편한데, 아름답게 연주하는 건 왜 그렇게 힘든가요?"

서혜경은 지난달 말 이틀간 모차르트협주곡 19번과 23번을 마리너 지휘로 ASMF와 녹음했고, 20번과 21번 녹음을 앞두고 있었다. 모차르트 음악의 대가(大家)가 위로하듯 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듯 연주에 집중하면 돼요, 나를 쳐다보지 말고…. 내가 당신을 보고 있으니까."

서혜경은 이날 오후 마리너가 외출하고 텅 빈 거실에 남았다. 하이힐을 벗어 던진 그녀는 맨발로 페달을 밟으며 몇번이고 건반을 되짚었다.

#런던 그리니치 블랙히스 홀

7일 오후,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을 녹음하는 날이다. 블랙히스 홀은 1881년 설립된 블랙히스 음악원의 콘서트홀. 30여명의 오케스트라가 앞쪽에 둘러앉았다. '아마데우스' 주제곡 격인 1악장 첫 부분이 성능 좋은 스포츠카 엔진 시동 걸듯 단박에 '우르릉'하고 울렸다.

10분 남짓 1악장 전체를 연주한 후, 마리너와 서혜경이 홀 옆 조정실로 향했다. 음향 엔지니어 앤서니 포크너가 금방 녹음한 1악장을 스피커로 들려줬다. 그는 피아니스트 키신 음반 등으로 그래미상을 두 차례 받은 이 분야 최고 전문가다. "혜경, 좀 더 밝게 연주하는 게 어떨까"(마리너) "피아노 소리가 약간 탁하지 않아요? 난방 때문인가…."(서혜경) 1악장만 대여섯 차례 연주하면서 콘서트홀과 조정실을 몇 차례 오간 끝에 OK 사인이 났다. 녹음은 저녁 식사 후 오후 8시까지 이어졌다.

#다시, 블랙히스홀

8일 오전 10시 30분. 이날 회당 3시간씩, 두 세션만 마치면 음반 녹음은 마무리된다. 오늘은 모차르트 협주곡 21번. 아침에 듣는 모차르트의 현(絃)이 이렇게 맑고 상쾌할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앙상블을 자랑하는 ASMF가 손 뻗으면 닿을 듯 몇 m 앞에서 연주 중이다. 몇억짜리 오디오로도 재현할 수 없는 소리다.

피아니스트 서혜경(맨 앞)이 7일 런던 그리니치 블랙히스홀에서 네빌 마리너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을 녹음하고 있다. /런던=김기철 기자
피아니스트 서혜경(맨 앞)이 7일 런던 그리니치 블랙히스홀에서 네빌 마리너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을 녹음하고 있다. /런던=김기철 기자
콘서트홀과 조정실을 오가며 1악장 녹음이 마무리된 것은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 30분. 점심은 햄 샌드위치로 때웠다. 이어 영화 '엘비라 마디간'으로 유명한 2악장. 오후 4시쯤 녹음이 모두 끝났다. 네빌 마리너는 "서혜경의 모차르트 해석은 매우 대담하다. 함께 연주할 기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42년 전, 열한 살에 선 명동 국립극장

이날 녹음한 모차르트 협주곡 21번을, 그녀는 열한 살 때 KBS교향악단 전신인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했다. 1971년 명동 국립극장이었다. "그땐 예쁜 옷 입고 자랑하느라 정신없었지요. 연주자로 살아가는 게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2007년 유방암 수술은 고비였다. 더는 연주를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듬해 재기에 성공한 후,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2010년)과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집(2011년)에 이어 올해 모차르트 협주곡까지 음반 녹음에 매달리고 있다. 50대 중반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살아남는 건 쉽지 않은 듯했다. "한번 찾아보세요. 제 나이에 연주자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가 있나."

음반 녹음은 "나, 지금, 연주하고 있다"고 외치는 서혜경의 존재 증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혜경의 모차르트 협주곡 음반은 내년 초 도이체그라모폰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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