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돌을 지난 루아가 태어나자, 두 개의 음반이 탄생했다. 재즈 보컬리스트인 엄마 신예원은 딸의 이름을 붙인 동요집을 발매했고, 할아버지 정명훈은 손녀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녹음했다. 독일의 유명 레이블 ECM에서였다. 게다가 루아의 아빠 정선 씨는 ECM 프로듀서다.

“아버지, 저희 7분 있으면 도착합니다.”
‘7분이라고? 10분이면 10분이지, 7분이라니!’ 며느리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전화통화 소리를 듣고 의아했다. 7분의 비밀은 시댁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7분은 바로 스파게티 면 익는 시간이었어요. 아버님은 저희가 도착했을 때 딱 맞춰서 음식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꼭 스파게티 면이 아니더라도, 다른 음식도 딱 맞는 온도에 맞춰 주세요. 요즘도 저희는 도착하기 몇 분 전에 아버님한테 전화해요.”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정명훈의 둘째 며느리 신예원의 이야기다. 정명훈은 이탈리아 요리로 요리책을 냈을 정도로 요리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다. 무대 위에서는 엄격한 지휘자이지만,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그 사랑은 바로 요리로 표현되고 있었다.
“아버님은 정말 편하게 저희를 대해주세요. 시아버지 대회가 있다면 아마 대상감이 아닐까요?(웃음) 저뿐 아니라 세 며느리에게도 조건 없이 사랑을 주시는 분이에요. 저는 결혼 전부터 아버님이 음악여행을 하실 때 따라다녔어요. 저희 가족은 굉장히 가까워요. 아버님이 가족이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어떻게든 자주 모이는 편이고요.”
함께해서 행복한 음악가족
2년 전 정명훈이 서울의 한 백화점에 마련한 작은 재즈 무대에서 공연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가 작은 무대에, 그것도 재즈 공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이 자리에는 바로 재즈 기타리스트 정선, 재즈 보컬리스트 신예원이 있었다. 정명훈은 무대 규모를 떠나 아들, 며느리와 함께 공연하는 것에 굉장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올해, 정명훈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또 한 차례의 공연에 섰다. ECM 페스티벌이다. 정명훈은 페스티벌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 자리에 며느리 신예원과 나란히 참석해, 아들 부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가족’입니다. 이번 ECM을 하게 된 것은 제 둘째 아들인 정선(ECM 프로듀서)이 이곳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기 시작했고, 신예원 또한 ECM과 처음 레코딩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데, 재즈를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CM은 재즈도 하고 클래식도 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과 참 잘 맞습니다. 이렇게 가족과 함께 해본 적이 없었는데 특별히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어 좋습니다.”

페스티벌이 끝난 후 만난 신예원 역시 “가족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뿌듯한 행사였다”고 되돌아봤다.
“사실 기자회견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정말 떨렸죠. 공연할 때 떨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굉장히 떨렸죠. 그래도 아버님이 곁에 계셔서 큰 의지가 됐어요.”
평소 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고 알려진 정명훈은 이번 페스티벌이 아들이 주최한 페스티벌이라 더욱 뜻깊어 했다.
“ECM은 재즈·클래식 녹음에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 유명 음반 레이블이에요. 아버님은 이런 세계적인 레이블에 남편이 아버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시스트 프로듀서로 들어갔다는 것을 정말 뿌듯해하셨어요. 남편이 한국에서 ECM 페스티벌을 연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뻐하셨죠. 아버님은 페스티벌에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참가하셨어요.”
시아버지는 지휘로, 며느리는 보컬리스트로 각각 ECM 아티스트들과 함께 공연을 마련했다. 비록 한 무대는 아니었으나, 공연을 주최한 아들까지 온 가족이 즐거웠던 축제였다.
“저희는 함께 공연한다는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음악 이외에도 정말 잘 뭉치거든요. 아, 시아주버님 결혼식에서 제가 축가를 불렀는데, 아버님이 피아노를 친 적이 있네요.(웃음) 비록 저희 부부는 재즈, 아버님은 클래식 음악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 여러 음악을 좋아하니까 잘 통하죠. 삶도 비슷비슷하고요. 서로 공연을 보아도, 단순히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저희는 좀 더 서로의 음악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아요.”
딸 루아로 시작한 두 개의 음반
ECM은 이 가족에게 더 특별해졌다. 신예원이 한국인 최초로 ECM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했고, 올 12월에는 정명훈의 피아노 음반도 나올 계획이다. 두 음반 모두 ‘가족’이라는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뜻깊다. 먼저 정명훈의 음반 소개부터.
“나중에 발매될 때쯤 말씀드리겠지만 둘째 아들(정선)이 저에게 몇 달 전 피아노 앨범을 만드는 게 어떨지 제안했습니다. 손녀 둘이 생겨서 그 아이들을 위해 앨범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그런 제안을 하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모아봤고, 12월쯤 나올 예정입니다.”
정명훈의 아들 며느리 사랑보다 더 극진한 것이 바로 손녀 사랑인가보다. 지휘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내는 피아노 솔로 음반이다.

신예원의 음반은 한국 동요를 담은 <루아야>다. 루아는 정명훈의 손녀딸이자 신예원의 딸 이름. 그런데 이 음반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제 남편이 보스턴에 있는 녹음실에서 피아니스트 애런 팍스와 녹음을 했는데, 제가 따라가서 음식을 해주었죠. 음악이라는 건 전체 경험이 중요해서 누구와 어느 공간에, 또 바로 직전 무엇을 먹었는지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런데 홀 사운드가 정말 좋은 거예요. 모든 게 피아노 녹음 세팅으로 되어 있었지만, 남편이 목소리는 어떨지 궁금하다면서 노래를 불러보게 했어요.”
신예원은 어떤 곡을 부를지도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불러보기로 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섬집아기’였다.
“음악이 흐르는 대로 나둬보자고 했더니, ‘섬집아기’가 나오는 거예요. 피아니스트 애런은 그 음악에 맞춰 화성을 치기 시작했죠. 자신의 느낌대로. 자연스럽게 즉흥연주가 된 거예요. 물론 애런은 처음 듣는 노래였어요. 그때 느낌이 정말 좋은 거예요.”
즉흥적으로 ‘섬집아기’를 녹음 한 뒤, 몇 주 후 신예원은 딸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섬집아기’를 불렀을 때가 바로 임신 초기였다는 사실도.
“음반을 만들려한 건 아니지만, 그때 기억이 좋아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아기가 제게 준 메시지 같기도 했고, 저도 워낙 동요를 좋아했으니까요. 따로 동요를 편곡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애런에게 많이 불러줬죠. 제가 엄마에게서 동요를 배웠거든요. 엄마가 동요를 많이 불러줬어요.”
이들은 ‘섬집아기’를 비롯해, ‘구름’, ‘달맞이’, ‘과수원길’, ‘오빠생각’, ‘구슬비’ 등 총 열두 곡의 동요를 녹음했다. 이 중 자장가는 두 사람이 동심으로 돌아가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다.
“그냥 즉흥적으로 시작해서 저도 모르게 나오면 나오게끔 내버려뒀어요. 그래서 구슬비나 과수원길은 반복되기도 해요. 그래서 좋았어요. 서로 동심으로 돌아갔죠. 동요 앨범을 만들기보다는 어린 시절 동심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두 사람은 녹음을 하면서도, 음반으로 발매할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더 진솔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던 걸까. 신예원의 목소리는 깊은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맑고 청초하다. 정명훈은 며느리 음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모든 음악가는 자기 내면의 소리, 감성을 표현하고 싶을 것입니다. 끝에 가서는 테크닉도 끌어내야겠지만 음악을 통해 나오는 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속에 있는 소리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예원의 목소리는 천상의 소리입니다. 내면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목소리가 음악을 통해 그대로 느껴집니다.”

운명적 만남, 우리는 솔메이트
<루아야>를 탄생하게 끔 한 숨은 조력자는 바로 루아의 아빠 정선 씨다. 신예원의 음반 역시 남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정선 씨는 신예원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제 인생에서 음악이 0순위였는데, 남편을 만나고 나서 가족이 제일 우선이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전 음악을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지, 제 음악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요.”
남편은 아내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법하다. 신예원은 제12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브라질 앨범 부문의 후보가 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재즈 스쿨에 들어갈 때 만나 서로 음악적인 고민을 나누며 성장해갔어요. 남편도 제가 음악 하는 사람으로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더 아쉬웠을 거예요. 남편은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에요. 제가 나 자신일 수 있게 해주는 지구상의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제 음악을 가이드해준다는 사실은 특별하죠.”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와 같다. 신예원은 결혼식 축가를 부르러 갔다가 가수 제의를 받고 가수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1집 <lovey>를 냈고, 청아한 목소리로 김진표의 ‘유난히’와 이승환의 ‘사랑하나요’ 피처링을 하며 유명해졌다. 이 시기 코러스로 참가한 공연에서 재즈 기타리스트인 남편을 만났다.
“저희는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 뭔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2년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서로를 놓칠 수 없었죠. 남편은 처음부터 좋았고, 점점 좋아져요. 처음에는 같이 연주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음악이 삶에 깊이 들어올 수 있게 철학을 가지고 있어 좋아요. 남편은 저보다 한 살 어리지만 더 깊이 있고, 멀리 볼 줄 알고, 음악을 공유하며 자극을 주는 사람이죠.”
남편 정선 씨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물어보니, 부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번은 남편이 제게 ‘우리 아버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고 했어요.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남편과 친해지고 나서 아버님 집에서 머물게 됐는데, 시차 때문에 잠깐 깨서 나와 보니 정말 그 새벽에 아버님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어머님이 깰까봐 전날 저녁에 갈아놓은 커피를 끓이고요. 그리고 커피가 끓는 잠시 동안에도 공부하는 분이에요.”
그렇다면 남편 정선 씨는?
“남편은 아버님을 닮아 부지런하지만 인생을 즐길 줄 알아요. 쉴 때는 엄청 나태하게 쉬고, 일해야 할 때는 아버님처럼 완전히 칼날같이 해내죠. 그게 부러워요.”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신승희, 크레디아 | 장소 협찬 그랜드하얏트 제이제이 마호니스(02-799-8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