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村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80년 전으로

입력 : 2013.03.29 03:04   |   수정 : 2013.03.29 09:12

장소: 이상이 문 연 제비다방드레스 코드: 1930년대"현대 예술의 뿌리 찾다 보니일제강점기 지식인 문화 있어"행사 수익금 '이상의 집' 후원

보타이(나비넥타이)를 맨 '모던보이'들과 진주 목걸이를 한 '모던걸'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격양된 웃음이 터지고, 샴페인 잔이 부딪치고, 기포가 혀끝을 자극한다. 아코디언 연주에 흐느적거리는 여가수 노래도 섞인다. 1930년대 경성의 어느 풍경 같지만, 지금 여기는 2013년 3월 말 서울 통인동. 작고 낡은 '이상의 집-제비다방'이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유년~청년기 20년간 살던 집터에 지은 집을 개조해 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인수해 이상을 기념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제비다방'은 1933년 '박제된 천재시인' 이상과 그의 애인 금홍이 함께 문을 열었다는 다방처럼 '이상의 집' 내부를 개조한 프로그램이다.

서울 통인동‘이상의 집’제비다방에서 사진전‘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를 허하라’를 갖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인력거에 앉았다. 29일 밤 서촌 골목길에는 이런 인력거가 오갈 예정이다. /이덕훈 기자
서울 통인동‘이상의 집’제비다방에서 사진전‘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를 허하라’를 갖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인력거에 앉았다. 29일 밤 서촌 골목길에는 이런 인력거가 오갈 예정이다. /이덕훈 기자
서울 통인동‘이상의 집’제비다방에서 사진전‘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를 허하라’를 갖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인력거에 앉았다. 29일 밤 서촌 골목길에는 이런 인력거가 오갈 예정이다. /이덕훈 기자
오늘(29일) 밤, 서울 서촌(西村)은 80년 전으로 돌아간다. 거짓말 같은 이런 풍경은 물론 한 문화 행사의 일환. 이벤트 이름은 '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샴페인클럽)를 허(許)하라'다. 입장객은 되도록 '모던보이' '모던걸'처럼 입어야 하되, 이색적인 경험을 한껏 누릴 수 있다.

이 행사를 기획한 건 사진가 김용호(52)씨다. 김씨는 현대카드·벤츠·현대자동차·페라가모 등 국내외 유명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촬영한 사진가. 김씨는 이곳에서 모던보이·모던걸을 주제로 동명(同名)의 사진전을 연다. 28일 제비다방에서 만난 사진가는 "팍팍한 현실이지만, 그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은 우울했지만 한 줄기 낭만도 잊지 않았어요. 이건 현실도피적인 사치나 방탕과는 달라요. 어려운 형편의 아내가 남편에게 시곗줄을 선물하는 오 헨리의 소설 속 풍경, 척박한 땅 위에 그저 꽃 한 송이를 꽂는 즐거움과 비슷할 뿐이지요. 나는 그런 즐거움을 주는 '일일 마담'인 셈이고요."

전시에는 서울 중구 옛 미스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무대로 찍은 흑백사진 20여점이 선보인다. 그가 재해석한 이상의 대표작 '날개'의 장면들은 연극적이다. 등 뒤에 날개를 단 까칠한 얼굴의 남자, 고혹적 표정의 여인, 둘의 만남과 헤어짐, 비극적인 결말까지. 곳곳에 스산한 은유가 넘친다.

김용호는 "수년 전 문화계 원로들의 얼굴을 주제로 사진전 '문화예술명인전'을 열었다가 오늘날 문화인의 '원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뿌리엔 일제강점기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있었던 거예요. 본격적으로 당시 지식인들의 생활을 파고들었지요. 시인 이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고요." 이런 이야기는 '이상의 집' 운영 주체인 (재)아름지기에 전해졌고, 이번 사진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화려한 파티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상의 집-제비다방' 프로그램이 그의 사진전을 끝으로 사실상 막을 내릴 예정이기 때문. 수많은 예술인의 사랑방을 자처했던 이상의 집은 조만간 다른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찾을 예정이다.

그러니 시간은 많지 않다. 오늘 밤은 장롱에 묵혀놨던 오래된 양복과 원피스를 꺼내입고, 천재 시인 이상과 그의 애인이 누렸을 탐미적이고 서글픈 풍류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행사·전시 수익은 전액 '이상의 집' 후원기금으로 전달된다. 4월 14일까지. 입장 무료. (02)741-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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