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10.21 14:07
조르주 쇠라는 어쩌면 미술가 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웠습니다. 보통 화가는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관람객들 역시 작품의 느낌을 자신만의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화가는 관객의 반응을 미리 예상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먼저 꼼꼼히 메모를 하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하기 위해 광학이론과 색채이론을 정리 하였습니다. 그리고 3미터 2미터가 넘는 큰 캔버스를 주문하였죠. 이 크기는 당시 잘 사용되던 사이즈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장소에 나가 40점 이상의 습작을 그리며, 차근차근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 그의 집념이 드디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이 화가의 이름은 조르주 쇠라, 그의 화법은 점묘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면 그 형태나 색채 구성 등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이 작품이 머리에 각인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작품이 주는 것은 수많은 궁금증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이 화가의 이름은 조르주 쇠라, 그의 화법은 점묘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면 그 형태나 색채 구성 등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이 작품이 머리에 각인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작품이 주는 것은 수많은 궁금증들입니다.

도대체 저렇게 큰 캔버스를 어떻게 다 점으로 채웠을까? 산책하러 나온 듯 보이는 여인이 끌고나온 저 원숭이는 도대체 뭘까? 눈길을 끌며, 가운데 그려진 흰옷 입은 소녀는 왜 유독 점묘법을 쓰지 않았을까? 덕분에 이작품은 수많은 전문가들을 끌어들여 쇠라를 연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조르주 쇠라는 성격 역시 매우 특이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늘 흐트러짐이 없었고, 항상 중절모에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명은 공증인. 그는 말도 통 없었고,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신비로웠다고 기억합니다.
조르주 쇠라는 성격 역시 매우 특이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늘 흐트러짐이 없었고, 항상 중절모에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명은 공증인. 그는 말도 통 없었고,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신비로웠다고 기억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화가로서 활동했던 기간은 불과 10년 정도입니다. 그리고 서커스는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전시되던 도중 쇠라는 갑자기 쓰러져 며칠만에 사망합니다.
그가 죽은 몇 년 후인 1900년 그의 최고의 걸작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프랑스의 한 수집가에게 800프랑에 판매되었습니다. 그 후 이 작품은 다시 미국인 프레더릭 클레이 바틀릿에게 2만 달러에 판매 되었고, 1924년 이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게 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프랑스는 거액을 제시하며, 이 작품을 팔 것을 시카고 미술관에 제안하지만, 미술관 측은 거절합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이미 시카고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니까요.
1958년 이 후 시카고 미술관측은 한 번도 이 작품을 미술관 밖으로 옮긴 적이 없습니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제 이 작품을 보려면 시카고에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가 죽은 몇 년 후인 1900년 그의 최고의 걸작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프랑스의 한 수집가에게 800프랑에 판매되었습니다. 그 후 이 작품은 다시 미국인 프레더릭 클레이 바틀릿에게 2만 달러에 판매 되었고, 1924년 이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게 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프랑스는 거액을 제시하며, 이 작품을 팔 것을 시카고 미술관에 제안하지만, 미술관 측은 거절합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이미 시카고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니까요.
1958년 이 후 시카고 미술관측은 한 번도 이 작품을 미술관 밖으로 옮긴 적이 없습니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제 이 작품을 보려면 시카고에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chosun.com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자료·영상 제공 : 서정욱 갤러리 대표 서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