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발레 콩쿠르 그리가로비치 심사위원장

"콩쿠르에 재능 있는 무용수들이 적을 때 심사는 고통이다. 이번엔 정반대라서 즐거웠다. 한국 발레 무용수들의 기량도 눈에 띄게 상승했다. 신체 조건, 기술, 표현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전설적인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82·러시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난 20일 폐막한 제11회 모스크바 발레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쓸 만한 남자 무용수가 부족하다는 게 요즘 발레단들의 공통된 고민"이라면서 "올해 모스크바 발레 콩쿠르는 출중한 발레리노들이 여럿 등장해서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이번 대회에서 은상을 차지한 세 명의 무용수 중 이동훈(23·국립발레단)과 김기민(17·한국예술종합학교)이 발레리노다.
그리가로비치는 프랑스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무용수 겸 안무가로 활약한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 이후 가장 성공한 고전발레 안무가로 꼽힌다. 음악을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모스크바 발레 콩쿠르도 그리가로비치가 볼쇼이극장 예술감독(1964~1995년)으로 있던 1969년 창설됐다. 그는 볼쇼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주역인 셈이다.
그리가로비치는 "클래식 발레도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레 테크닉, 특히 남자 무용수들의 기술이 좋아져 어떤 때는 아크로바틱에 가깝다"고 했다. 모스크바 발레 콩쿠르도 모던 발레 경연, 안무 경연 등을 도입하며 변화를 흡수하고 있다. 이 백발의 안무가는 "하지만 기본은 클래식"이라고 강조했다.
"부지런히 일해도 가난한 농부와 설렁설렁 사는데 부유한 농부가 있었다. 가난한 농부는 신(神)에게 그 까닭을 캐물었다. 신의 답은 '내가 널 싫어한다'였다. 최고의 예술은 노력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가로비치는 예술에서 재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다 전문 직업 무용수가 될 수는 있지만 영재성은 길러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래도 땀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영재는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보통 무용수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발레는 멸종 위기를 맞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가로비치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국립발레단에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스파르타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발레의 명작들을 안무했다. 이 거장과 국립발레단은 그가 안무를 맡을 5번째 작품도 논의 중이다.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레이몬다》다. 갈라 무대에 많이 오르지만 전막(全幕) 공연으로는 국내 초연이 된다. 그리가로비치는 "한국은 발레가 한창 발전하고 있는 나라여서 안무가로서도 행복한 작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