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첼로 칸타빌레

입력 : 2009.04.20 10:27

첼리스트 정명화

첼리스트 정명화/사진=CMI KOREA
첼리스트 정명화/사진=CMI KOREA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내 인생의 첫 프로 데뷔무대였던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있었던 날. 5천 명이 들어가는 야외무대에서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지만 하루 종일 쏟아지던 비로 인해 연주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연 두 시간 전, 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었고 자욱이 낀 안개와 높은 습도 속에서 나는 프로로서 생애 첫 연주를 하게 됐다.

오케스트라 단원과 청중을 통틀어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 속에 습기 가득한 첼로를 안고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했다. 공연을 무사히 끝낸 후 밀려왔던 뿌듯함과 안도감은 이후 40년을 첼로와 함께 해온 내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 준비에 한창인 요즘, 세계무대로 첫 발을 디뎠던 그 시절의 기억은 다시 한 번 나에게 처음 무대에 오르던 파릇한 설레임을 안겨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즐겼고, 유독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교내 합창대회 같은 작은 무대부터 '이화·경향콩쿠르' 같은 꽤 규모가 큰 무대에 이르기까지 악기 연주보다는 노래로 사람들 앞에 자주 서곤 했던 내가 첼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1살 무렵.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어머니께 첼로를 선물 받으면서부터였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은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색과 내 체구에 딱 맞는 몸체를 가진 첼로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나는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면서 '첼로는 평생을 연주할 내 악기'라는 확신을 키워갔다. 그리고 이화여자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첼리스트가 되기 위한 기량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의 줄리어드스쿨 음악학교에 입학한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넓은 세상 속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음악적 소양과 연주 실력을 배워갔다. 쟁쟁한 실력을 갖춘 세계 각국의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도 쉼 없이 악기를 연주할 만큼 열의가 가득했고, 그 학생들 틈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최선을 다했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치열한 경쟁을 견뎌야 했던 외국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큰 의지가 되고 가장 정확한 비평가가 되어 주기도 했던 언니와 동생이 함께 있었기에 언제나 마음만큼은 든든했다. 줄리어드스쿨 음악학교 졸업 후 남부 캘리포니아 마스터 클래스 과정에서 오래도록 존경했던 세계적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를 스승으로 모셨던 것은 내 음악인생에 큰 행운이었다.

본인의 연주 활동도 줄여가며 애정으로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여자는 결혼을 하면 연주자로서 활동하기 힘들어 진다고 이야기하던 것에 반해 피아티고르스키 선생님은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이며, 첼리스트로서 평화로운 가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며 가족과 음악, 인생에 대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가르침 덕분에 훗날 나는 일과 결혼, 육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결혼을 하고도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하는 여자 첼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1971년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된다. AP통신원이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것과 동시에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유럽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원으로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남편은 나보다도 더 많은 LP음반을 소장할 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국제적인 감각과 음악적인 감성을 갖춘 그는 세계 곳곳을 다녀야 하는 첼리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고, 덕분에 나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후 1978년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 로마에 정착한 나는 본격적으로 유럽 중심의 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나라들이 오밀조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각 나라마다 전혀 다른 문화와 풍광을 가진 유럽에서 보고 느꼈던 문화적 감성과 여유는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한국은 처음 내가 첼로를 시작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있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은 물론, 국제 콩쿠르에 참가해 입상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요즘, 나날이 성장하는 아이들의 연주 실력을 보고 있자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와 더불어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다듬어지고 채워졌던 첼리스트로서의 내 모든 것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더 커져간다. 첼로와 함께한 음악인생 40년. 첼로는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목소리였고, 운명적인 나의 삶 그 자체였다. 음악에는 완성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 연주를 멈추게 되더라도 첼로와 함께하는 내 인생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세상을 향하던 나의 연주가 미래를 이끌어갈 어린 학생들의 튼튼한 날개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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