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12.15 00:10
| 수정 : 2007.12.15 15:56
우리 정서에 맞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작자 의도 충분히 살리려는 노력 필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언급된 ‘남귤북지(南橘北枳)’를 직역하면 강남의 귤나무를 환경이 다른 강북에 심으면 귤 대신 탱자가 열린다는 뜻이 되고, 이를 의역하면 같은 것이라도 다른 풍토에서는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 국내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원작은 프랑스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마르셀 에메의 동명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96년 파리에서 뮤지컬로 각색돼 초연했고, 2002년에는 영어로 번안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되었다.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미국 프로듀서들은 이 작품의 원작이 미국에서 인지도가 매우 낮은 데다 프랑스 특유의 유머 코드와 솜털처럼 가벼운 프렌치 재즈 스타일의 음악이 자국의 관객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작품을 미국 스타일로 대폭 수정했다. 제목부터 누구나 아는 단어인 ‘아모르(Amour·사랑)’로 바꾸었는가 하면, 남자 주인공의 이름 ‘듀티율’과 극 중 예명 ‘가루가루’도 각각 ‘뒤솔레이’와 ‘패스파투’로 개명하고, 파리의 신문팔이 소년이 파는 신문도 미국의 데일리 뉴스로 설정했다.
현재 국내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원작은 프랑스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마르셀 에메의 동명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96년 파리에서 뮤지컬로 각색돼 초연했고, 2002년에는 영어로 번안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되었다.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미국 프로듀서들은 이 작품의 원작이 미국에서 인지도가 매우 낮은 데다 프랑스 특유의 유머 코드와 솜털처럼 가벼운 프렌치 재즈 스타일의 음악이 자국의 관객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작품을 미국 스타일로 대폭 수정했다. 제목부터 누구나 아는 단어인 ‘아모르(Amour·사랑)’로 바꾸었는가 하면, 남자 주인공의 이름 ‘듀티율’과 극 중 예명 ‘가루가루’도 각각 ‘뒤솔레이’와 ‘패스파투’로 개명하고, 파리의 신문팔이 소년이 파는 신문도 미국의 데일리 뉴스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평범한 남자가 자유롭게 벽을 드나드는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벽을 뚫는 남자’는 정작 대서양을 자유롭게 드나들지는 못했다. ‘귤’이 가진 낭만적인 정서와 유려한 노랫말은 자국의 대중성을 앞세운 가벼운 유머에 밀려 ‘탱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이사벨이 감옥에 갇힌 뒤솔레이의 탈옥을 바라며 “TNT로 폭파하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당신은 가능해요”라고 노래하고, 그가 풀려난 후 사랑의 듀엣을 부르며 “TNT의 로맨틱 드라마 같은 사랑을 꿈꿔왔어요”라고 외치는 가사에 이르면 미국 관객들은 모두 웃게 된다. TNT는 폭탄임과 동시에 미국의 유명한 가족 오락 채널인 터너 네트워크 텔레비전의 이니셜이기도 하다.
뮤지컬에서 일반화된 ‘라이선스 방식’은 외국 원작의 대본과 가사를 한국어로 바꾸어 우리 배우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적으로 공연자는 번역하더라도 원작이 지닌 의미를 최대한 전달해야 하고 캐릭터, 소재 혹은 단어를 멋대로 바꿀 수 없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한국어 버전 공연에서 오리지널 가사가 프랑스 특유의 유려한 시어(詩語)라는 점에서 제작사는 그에 상응하는 한글 가사를 찾기 위해 특별히 국문학에 조예가 있는 창작 인력을 투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뮤지컬 시장이 고속 성장하고 있고 해외 원작자들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점차 한국에 맞는 각색을 허용한다는 뜻으로 “코리아나이즈(Koreanize)가 가능하다”는 문구를 계약서에 삽입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개작(改作)의 수위가 높아져서 아예 창작에 가깝게 원작을 변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06년에 공연된 뮤지컬 ‘클로저 댄 에버’는 장면이 모두 분리된 전형적인 옴니버스 극이지만 한국에서는 얽히고설킨 친구 관계로 설정된 6명의 젊은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소극장 특유의 정서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작이 가지는 연령대와 배경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협소하게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해외 배우들이 내한해서 원작을 그대로 공연한다고 하더라도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극장이 가진 태생적인 조건 때문에 그 정서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4년 ‘카바레’와 2005년 ‘렌트’ 투어 공연은 모두 단일 세트로 이루어진 아담한 무대가 최적인 작품이지만 각각 3000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올림픽 홀에서 공연을 해 작품성과 관계없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 모두 결코 쉽지 않은 ‘로컬라이징’ 작업의 험난한 여정일 것이다.
물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도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완성된 작품성을 가질 수도 있다. 김성녀가 출연한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은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희곡으로 쓴 것을 우리 작가가 우리 상황에 맞게 6·25 직전부터 90년대까지로 배경을 바꾸었다. 이 작품은 창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각색으로 평가할 수 있고 원작자 측도 만족을 표시했다. 이보다 앞서 ‘지하철 1호선’ ‘의형제’ ‘모스키토’ 등을 제작한 극단 학전의 레퍼토리들은 해외 원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하여 이질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번역과 각색 어느 쪽도 쉽진 않다. 하지만 관객을 의식해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원작자가 애초 작품에 불어넣은 정신과 영혼을 최대한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 각색이 ‘제2의 창작’이라지만 원작은 ‘제1의 창작’이 아닌가?
여주인공 이사벨이 감옥에 갇힌 뒤솔레이의 탈옥을 바라며 “TNT로 폭파하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당신은 가능해요”라고 노래하고, 그가 풀려난 후 사랑의 듀엣을 부르며 “TNT의 로맨틱 드라마 같은 사랑을 꿈꿔왔어요”라고 외치는 가사에 이르면 미국 관객들은 모두 웃게 된다. TNT는 폭탄임과 동시에 미국의 유명한 가족 오락 채널인 터너 네트워크 텔레비전의 이니셜이기도 하다.
뮤지컬에서 일반화된 ‘라이선스 방식’은 외국 원작의 대본과 가사를 한국어로 바꾸어 우리 배우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적으로 공연자는 번역하더라도 원작이 지닌 의미를 최대한 전달해야 하고 캐릭터, 소재 혹은 단어를 멋대로 바꿀 수 없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한국어 버전 공연에서 오리지널 가사가 프랑스 특유의 유려한 시어(詩語)라는 점에서 제작사는 그에 상응하는 한글 가사를 찾기 위해 특별히 국문학에 조예가 있는 창작 인력을 투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뮤지컬 시장이 고속 성장하고 있고 해외 원작자들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점차 한국에 맞는 각색을 허용한다는 뜻으로 “코리아나이즈(Koreanize)가 가능하다”는 문구를 계약서에 삽입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개작(改作)의 수위가 높아져서 아예 창작에 가깝게 원작을 변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06년에 공연된 뮤지컬 ‘클로저 댄 에버’는 장면이 모두 분리된 전형적인 옴니버스 극이지만 한국에서는 얽히고설킨 친구 관계로 설정된 6명의 젊은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소극장 특유의 정서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작이 가지는 연령대와 배경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협소하게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해외 배우들이 내한해서 원작을 그대로 공연한다고 하더라도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극장이 가진 태생적인 조건 때문에 그 정서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4년 ‘카바레’와 2005년 ‘렌트’ 투어 공연은 모두 단일 세트로 이루어진 아담한 무대가 최적인 작품이지만 각각 3000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올림픽 홀에서 공연을 해 작품성과 관계없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 모두 결코 쉽지 않은 ‘로컬라이징’ 작업의 험난한 여정일 것이다.
물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도 있듯이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파생형이 좀 더 완성된 작품성을 가질 수도 있다. 김성녀가 출연한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은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희곡으로 쓴 것을 우리 작가가 우리 상황에 맞게 6·25 직전부터 90년대까지로 배경을 바꾸었다. 이 작품은 창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각색으로 평가할 수 있고 원작자 측도 만족을 표시했다. 이보다 앞서 ‘지하철 1호선’ ‘의형제’ ‘모스키토’ 등을 제작한 극단 학전의 레퍼토리들은 해외 원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하여 이질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번역과 각색 어느 쪽도 쉽진 않다. 하지만 관객을 의식해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원작자가 애초 작품에 불어넣은 정신과 영혼을 최대한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 각색이 ‘제2의 창작’이라지만 원작은 ‘제1의 창작’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