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콘 없는 방'의 배우 한명구
연출가 '피터 현' 통해 본 현대史… "젊은 시절 내 모습 돌아보게 돼"
서울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연극 '에어콘 없는 방'(연출 이성열)의 배우 한명구(57)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지금 만약 피터 현을 만난다면 훌륭한 인생을 사셨다고 악수를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한명구가 연기한 피터 현(1906~1993)은 젊은 시절 뉴욕에서 연극 연출가로 일했던 실존 인물이다. 언론인 피터 현과는 동명이인이다. 그의 아버지 현순(1880~1968) 목사는 중국 상하이와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누나 앨리스 현(1903~1956)은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된 인물이다. 그의 가족사(史)는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상당 부분 포개진다.

"2년 전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부담감이 상당했습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도 어려웠지만, 실질적으로 피터 현 본인이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왜 굳이 그를 다뤄야 하는지도 의문이었지요. 하지만 대본을 파고들면서 특정인의 삶에 집요한 확대경을 댄다기보다는 피터 현을 통해 불안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네 존재를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연극은 피터 현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받은 아버지의 유분(遺粉)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1975년 어느 하루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했지만 좌익 혐의로 추방됐던 피터 현. 이제는 다시 아버지 덕에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돌아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며 벌이는 분열적 환상 장면에서 연극은 절정에 달한다. 지난해 벽산희곡상 수상작(원제 '유신호텔 503호')이다. 독보적인 에너지로 극 대부분을 끌어가는 한명구는 피터 현의 자서전 '만세!' 등을 탐독하며 당시 인물로 들어가려 애썼다.
"피터는 세 가지 콤플렉스를 가진 것으로 보여요. 첫째는 남북이 분열되던 시절 뼈아프게 겪어냈던 레드 콤플렉스고, 둘째는 미국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믿었던 자신의 단원들에게 배신당하며 겪은 인종차별,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멘토나 마찬가지였던 누나에 대한 부채의식이죠. 과거의 자신과 만나고, 스스로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장면을 연기하면 할수록 자꾸만 연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5년 극단 목화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한명구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부자유친' '레드' 등 다양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2011년 이해랑 연극상을 받았다.
"젊은 시절 제가 나타난다면 지금의 저에게 '왜 더 치열하게 살지 않았니'라고 따질지도 모르죠(웃음). 과거의 저는 참 오합지졸 같았거든요. 되는 일은 없는 것 같고, 애는 쓰는데 그게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저의 선택은 직진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돌파해 오니 좋은 날도 오더군요."
그는 극 중 대사인 "종말은 이미 와 있다. 너의 발걸음이 또다시 땅을 디딜 거라는 보장은 없다"를 특히 좋아한다면서 "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옳다는 걸, 어떤 이에겐 실패한 인생으로 보일진 몰라도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인생이라는 걸 깨치게 해 준다"고 말했다. 10월 1일까지.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