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환상과 현실의 경계서 겪는 '잔혹 成長동화'

입력 : 2016.05.13 01:12

핑키와 그랑죠

"핑키의 전쟁 이야기 52권. 애비엔의 공주이자 전사인 핑키의 지휘 아래 아이들은 그랜델리니아의 사악한 존에 맞서 싸웠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수호자 헨리도 함께였고요."

도입부의 대사만 들으면 영락없는 동화나 판타지 장르 같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무대는 서재와 장난감이 있는 보통 가정집이고, 14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는 '전투' 장면은 종이 인형과 그림자극으로 표현된다. "월요일 게릴라 전투에서 452명이 죽었다"는 식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이 집에 사는 아버지 헨리(김재건)와 딸 핑키(이현주)다.

주인공 핑키(이현주·왼쪽에서 둘째)는 양아버지 헨리(김재건·오른쪽)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세계에서 살다가 죽은 줄 알았던 동생 그랑죠(김영택·맨 왼쪽)의 출현으로 충격에 빠진다. /CJ문화재단 제공
주인공 핑키(이현주·왼쪽에서 둘째)는 양아버지 헨리(김재건·오른쪽)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세계에서 살다가 죽은 줄 알았던 동생 그랑죠(김영택·맨 왼쪽)의 출현으로 충격에 빠진다. /CJ문화재단 제공

극은 8년 전에 '전사'한 줄 알았던 핑키의 동생 그랑죠(김영택)가 돌아오면서 전환을 맞는다. "누난 집 밖으로 나가본 적 없지? …밖에선 아무도 애비엔을 몰라!" 이제 헨리와 핑키 사이에서 견고하게 유지되던 세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연극 '핑키와 그랑죠'(신채경 작, 문삼화 연출)는 현실과 환상, 아바타와 트라우마, 퇴행과 성장, 그리고 문을 열고 나서면 또 다른 문이 나타나는 몇 겹의 다층적 은유로 신비롭게 싸인 기묘한 연극이다. 스물넷이 되도록 집 밖에 나가지 않고 환상 세계 속에 틀어박혀 살아온 핑키는 어린 시절 동생 그랑죠와 함께 고아원 원장 존에게서 잔혹한 학대를 받았다.

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헨리는 두 아이를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 역시 유년 시절 학대당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힘을 갖고 학대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한 것. 연극은 두 남매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고통스럽게 딛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는 결말을 통해 '성장'에 방점을 찍는다. 젊은 작가 신채경의 참신한 극본에 중견 연출가 문삼화가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CJ문화재단이 지난달 말 대학로에 문을 연 소극장 CJ아지트의 첫 연극 작품이다.

▷15일까지 CJ아지트 대학로, 공연 시간 95분, 070-8129-7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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