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역 두 시선] 임혜영 "뮤지컬 '아리랑' 수국, 그 자체로 빠져들었죠"

입력 : 2015.08.17 13:52
※공연의 캐릭터는 영상의 등장인물과 달리 날마다 새로 숨쉰다. 같은 장면에 같은 감정을 가지고 같은 연기를 선보이지만 배우의 컨디션과 그날 감정 상태, 상대 배우와 호흡, 관객들의 분위기에 따라 같은 캐릭터라도 다른 결을 지니게 된다. 특히 배우들의 감정의 진폭이 큰 뮤지컬에 '회전문 관객'이 많은 이유다. 여기에 같은 배역에 여러 배우가 동시에 캐스팅된 경우에 그 캐릭터의 결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에 따라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면 그 만큼 캐릭터가 입체적일 거라 생각했다.

첫 캐릭터는 초연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뮤지컬 '아리랑'의 '수국'. 작가 조정래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에서 겁탈당하고 어머니를 눈 앞에서 바로 잃는 등 일제에게 온갖 치욕을 받는 수국은 감정 변화가 제일 드라마틱하다. 고선웅 연출의 인장과도 같은 '애이불비'(속으로는 슬프면서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체 하는 것)의 상징으로 그 치욕에도 꿋꿋이 살고자 했고, 자신이 사랑한 '득보'와 함께 세상과 작별한 뒤에도 상여(喪輿)에 오르더니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진도아리랑을 신나게 부른다.

이번 '아리랑' 초연의 수국은 뮤지컬스타 임혜영(33)과 윤공주(34)다. 부러질 듯하면서도 그 중심을 끝재 놓지 않는 수국(임혜영), 꿋꿋하면서도 강단 있는 수국(윤공주) 두 수국을 모두 봐야 이번 '아리랑' 수국의 퍼즐이 정확히 맞춰진다. 최근 역삼동과 양재동에서 하루 차이로 만나 두 수국에게 차례로 빠져들었다.
임혜영 만큼 억울한 배우도 없다. 밝고 사랑스런 '그리스'의 '샌디', 싱그러움과 씩씩함을 잃지 않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페기 소여', 애절한 사랑 연기를 선보인 '미스사이공'의 킴, 점차 단단하게 성장해가는 '레베카'의 '나'와 '팬텀'의 '크리스틴'까지… 다양한 뮤지컬에서 다채로운 캐릭터 스펙트럼을 선보였음에도 청순한 외모로 인해 주로 공주나 연약한 여성 이미지로 부각된다. 수국은 임혜영의 다양한 매력을 새삼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실제 꽃 이름이기도 한 수국처럼 예쁘고 연약해보이지만 생명력이 강한 이 캐릭터에 제격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수국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과 맞물리며 감동을 뭉근하게 지속시킨다.

-처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때문에 온갖 역경을 겪는 수국 역에 낯설 수도 있다고 일부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가 있었는데 안성맞춤 캐릭터라 많은 분들이 놀라고 있어요.

"배우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느낌이나 이미지가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과 다를 수 있잖아요. 스스로는 어떤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수국 역의 모습을 제 안에서 보시고 캐스팅해주셔서 너무 즐겁고 신났어요(웃음)."

-'아리랑'과 수국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웃음)?

"참여할수록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요. 배우는 것도 많아서 좋고요. 특히 고선웅 연출님과 첫 작업인데 소문을 익히 듣고 있어서 꼭 함께 해보고 싶었거든요. 기존 번역극과는 스타일이 다른 작품을 만드셔서 설렘도 컸죠. 어떤 작품이 될까, 상상은 못 했어요. 그저 연출이 '대장'이니까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연출님이 배우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아요.

"연습실에서 누구 하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해요. 연출님이 주시는 디렉션을 100% 따라하면 그게 맞아요. 옛날 이야기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반영이 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부분을 잘 짚어주세요."

-수국은 너무나 슬픈 캐릭터입니다. 애이불비 정서가 묻어 있어서 더 슬퍼요.

"슬픔 속에서 아픔 속에서 어떤 색깔의 연기를 택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죠. 각자 경험한 것 안에서 그것을 꺼내서 색깔에 맞게 연기를 해야죠. 제가 어릴 때는 슬프면 더 슬프게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수국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에요. 아프기는 엄청 아픈데 그 아픔을 얼굴로 눈물로 소리로,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르고 단단한 상태가 될 때까지 참아야 해요.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프죠. 제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수국을 통해 슬픔을 느끼도록 해야죠. 관객이 공감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한 캐릭터에요."

-수국을 연기할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있나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제 안에 비슷한 모습을 찾고 그것을 꺼내서 사용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설정하기 보다는 수국 그 자체에 빠져들었어요. 매번 수국처럼 제게도 그 상황이 처음인 듯,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죠. 생각하지 않고 장면의 감정마다 반응하려고요."

-수국(水菊)이 원래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요?

"일본 여행을 갔는데 시골의 어떤 집이었어요. 그 집의 돌벽에 수국이 정말 넝쿨째 매달려 있는데 정말 화려했죠. 수국이 이름처럼 물을 좋아하잖아요. 화려하고 약해보이지만, 푹 시들었을 때도 물을 주면 다시 잘 살아나죠. 작고 여린데 그렇게 잘 견디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아리랑'의 수국처럼요."

-수국과 닮은 점이 있나요?

"가장 친한 언니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여리면서도 가장 강한 사람이 너'라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못할 것 같아도 쓰러질 것 같아도 어떻게든 해내려고 해요. 수국 역시 못 견딜 일들을 겪었는데 다 버티면서 살아내잖아요."

-그런데 혜영 씨 연기는 잘해서 튀려고 한다기보다 작품 안에 녹아들어가려고 하는 인상이 짙어요. 그래서 앙상블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작품에도 잘 어울리죠.

"저는 튀고 싶지 않아요. 작품 분위기에 잘 녹아들어가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좋죠. 상대 배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분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해요. '아 저 배우가 왜 이렇게 안 하지'라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잖아요. 상대방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느끼면 저도 자연스레 움직이게 되죠. 무대 위에서 시야를 넓혀 세 명이 있으면 세 명, 모두 열 명이 있으면 열 명의 감정을 모두 느끼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모든 배역에 신경을 쓰는 '아리랑'이 정말 좋아요."

-성악을 전공했으니 노래는 워낙 잘하죠. 이번 '아리랑' 넘버들은 부르기 어떤가요?

"바로 직전에 출연한 '팬텀'은 노래를 정말 노래 부르듯이 불렀는데 '아리랑'은 노래를 말하듯이 불러야 해요. 대사를 전달하듯 노래를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심한 실수가 아니면, 목소리 갈라짐 자체도 노래의 감정선이 되는 거죠."

-정말 동안이라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믿기지 않지만 2006년 뮤지컬 '드라큘라'로 데뷔한 이래 벌써 10년차가 됐어요.

"데뷔 당시가 생각나요. '드라큘라' 연습이 한창일 때 대학교 졸업식이 끼어 있어서 졸업식 갔다가 연습에 좀 늦을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당시 앙상블이자 주인공 커버였는데 연습실 가는 게 소풍 가는 듯 즐겁고 재미있어요. 버스를 타고 연습실이던 한전아트센터를 왔다갔다 했는데 그 때 느끼던 봄바람이 아직도 떠올라요. 마냥 행복했죠. 지금은 생각도 많아지고 책임감도 생겼죠. 캐릭터를 더 나아지게 만드느라 고민하면서 예민해지기도 하고. 정말 어렵고 힘든데 무대 위에 오르면 또 좋고(웃음)."

-30대를 넘긴 이후 여배우로서 점차 고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요.

"사실 무대에 서는 순간 순간 자체가 아깝고 무대가 간절해져요. 당연히 지금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죠. 앙상블 하는 친구들 중에서 저보다 열 한살이나 어린 친구가 있는데 너무 예쁘고 잘해요. 저는 언제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죠. 당연히 미련이 생기고 아쉬움이 남겠지만 내려올 때 잘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커요(웃음). 지금 무엇인가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죠. 나중에 지금을 돌이켜봤을 때 '열심히 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하면 될 것 같아요."

-'아리랑'과 '수국'이 혜영 씨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나요.

"'아리랑'과 수국 덕분에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욕심 때문에 한 때 힘들기도 했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과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르더라고요. 무엇인가에 연연하다 보면 저만 괴로워지죠. 이제 작품을 비롯해 저와 맞는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얻지 못하는 게 있더라도 그게 순리인 거죠. '아리랑'은 다행히도 행복하게 저와 인연을 맺었고요."

'아리랑' 9월5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송수익 서범석·안재욱, 양치성 김우형·카이, 수국 윤공주·임혜영, 득보 이창희·김병희, 감골댁 김성녀, 옥비 이소연. 6만~13만원. 신시컴퍼니·LG아트센터. 02-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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