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역 두 시선] 윤공주 "뮤지컬 '아리랑' 수국, 제 인생 전환점이죠"

입력 : 2015.08.17 10:02
※공연의 캐릭터는 영상의 등장인물과 달리 날마다 새로 숨쉰다. 같은 장면에 같은 감정을 가지고 같은 연기를 선보이지만 배우의 컨디션과 그날 감정 상태, 상대 배우와 호흡, 관객들의 분위기에 따라 같은 캐릭터라도 다른 결을 지니게 된다. 특히 배우들의 감정의 진폭이 큰 뮤지컬에 '회전문 관객'이 많은 이유다. 여기에 같은 배역에 여러 배우가 동시에 캐스팅된 경우에 그 캐릭터의 결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에 따라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면 그 만큼 캐릭터가 입체적일 거라 생각했다.

첫 캐릭터는 초연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뮤지컬 '아리랑'의 '수국'. 작가 조정래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에서 겁탈당하고 어머니를 눈 앞에서 바로 잃는 등 일제에게 온갖 치욕을 받는 '수국'은 감정 변화가 제일 드라마틱하다. 고선웅 연출의 인장과도 같은 '애이불비'(속으로는 슬프면서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체 하는 것)의 상징으로 그 치욕에도 꿋꿋이 살고자 했고, 자신이 사랑한 '득보'와 함께 세상과 작별한 뒤에도 상여(喪輿)에 오르더니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진도아리랑을 신나게 부른다.

이번 '아리랑' 초연의 수국은 뮤지컬스타 윤공주(34)와 임혜영(33)이다. 꿋꿋하면서도 강단 있는 수국(윤공주), 부러질 듯하면서도 그 중심을 끝내 놓지 않는 수국(임혜영). 두 수국을 모두 봐야 이번 '아리랑' 수국의 퍼즐이 정확히 맞춰진다. 최근 양재동과 역삼동에서 하루 차이로 만나 두 수국에게 차례로 빠져들었다.
윤공주는 이번 '아리랑'의 수국 역으로 '또' 재발견됐다. 2001년 뮤지컬 '가스펠' 앙상블로 데뷔한 이 능수능란한 베테랑은 그럼에도 작품마다 완전히 캐릭터에 몰입하며 매번 신선함을 안긴다. 이번에는 세세한 연기력과 표현력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대형 뮤지컬 무대임에도 마치 "카메라 앞에서 세밀한 연기를 하듯"(소속사 PL엔터테인먼트 송혜선 대표) 수국의 감정을 섬세하게 연기해내며 뭉클함을 준다. -'아리랑' 공연 일정의 중반을 넘겼습니다.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 느끼는 부분이 있나요?

"'아리랑'은 처음부터 이유도 모른 채 끌렸어요. 우선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우리 민족의 아픔이 제일 크게 와닿았죠. 배우 윤공주뿐 아니라 인간 윤공주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작품이에요. 배우로서 깊어지고 인간 윤공주로서는 세상을 좀 더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됐죠."

-수국 자체가 갖은 역경을 겪는 캐릭터라서 그런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맞아요. 수국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갔다 또 다른 천국으로 가는 인물이죠. 수국의 그런 삶 자체를 겪다 보니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성장할 계기가 마련된 것 같아요."

-수국 자체에 몰입도가 상당한 듯해요. 앞서 제작발표회에서는 '아리랑'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죠.

"주책이었죠(웃음). 모르겠어요. '아리랑'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괜시리 눈물이 나요. 그만큼 작품에 빠져 있다느는 이야기일 텐데 빠지려고 노력을 해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물에 물감이 스며들듯이 저도 모르게 빠져든 거죠."

-이번의 수국 역을 비롯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혁명가 '마그리드' 등 한과 트라우마가 깃든 캐릭터를 통해 표현하는 감정이 절절하게 와닿아요.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고 힘든 때가 있죠. 그 때 힘들었던 시간이 제게 큰 자산이 됐고요. 그런 감정 자체가 이런 캐릭터와 잘 만난 것 같아요. 연기를 해야한다고 염두에 두는 순간 그 장면의 감정은 바로 거짓이 되죠."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밝은 역도 잘 어울립니다.

"제 안에 캔디 같은 모습이 있어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웃음). 제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서 역경을 이겨내는 캐릭터가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오죠. 꽃이더라도 쉽게 꺾이는 꽃이 아니라 잡초처럼 밟혀도 일어나는 그런 꽃이요."

-자신만의 인장이 분명한 고선웅 연출님과 작업이 처음인데 어떠셨나요?

"무엇보다 고선웅 연출님이 잘 이끌어주셔서 감정 표현이 한결 수월했어요. 연출님 말씀만 잘 따르면 자연스럽게 됐거든요. 배우들 사이에서는 '고 주교'로 통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해요. 강렬하기만 한 카리스마가 아니라 배우들 말을 다 귀 기울여 들으시고 수긍하신 다음 발휘하는 카리스마라 더 강하죠."

-매 무대마다 감정 소비가 심한 캐릭터라 갈수록 힘들지는 않나요?

"뮤지컬 초반에 혜영가 뮤지컬 '팬텀'에 출연 중이라 약 2주간 혼자 수국을 맡았고 너무 캐릭터가 아프게 다가왔는데 너무 좋아서 매일 하고 싶었어요. 공연하기 전에는 막 몸이 힘들고 그런데 무대만 올라가면 또 하고 싶고. 이제 몇 회 남지 않은 게 너무 아쉬워요."

-만약 공주씨가 수국처럼 그런 극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저 역시 득보를 사랑하지만 결혼을 못했을 것 같고, 내 전부였던 엄마가 떠난 것을 봤어도 수국처럼 제대로 울지 못하면서 아파했을 것 같아요. 저 역시 복수하려고 했을 것 같아요. 제가 수국이라도 똑같이 했죠."

-초반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의식 있는 양반인 '송수익', 그의 머슴이었다가 일제 앞잡이가 되는 '양치성'의 대립이 어느 이야기보다 도드라질 것 같았는데 모든 배역에 골고루 초점이 맞춰졌고 무엇보다 수국과 그의 어머니인 감골댁, 수국 못지 않은 수난의 나날들을 이겨내는 '옥비' 등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뮤지컬은 아무래도 남성 캐릭터가 도드라지는데요.

"물론 남자가 주인공이면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역의 비중이 적다고 연기도 그 만큼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 배역은 자기 것이니 최선을 다해야죠."

-멋진 생각인데요. 배우로서 참 좋은 자세네요.

"2003년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에 앙상블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박건형, 최정원 등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출연한 뮤지컬인데 저는 앙상블이니 주로 뒤에서 춤을 췄죠. 관객들에게 잘 안 보여요. 그런데 저는 이 앙상블 캐릭터가 제게는 주인공이니 마치 제가 주인공인양 열심히 연기를 해가며 춤을 췄죠. 무대는 인생의 축소판이잖아요. 인생도 더 조명받고 덜 조명 받는 사람이 있지만 개개인의 삶에서는 자신이 모두 주인공이잖아요. 무대에서도 주연, 조연이 따로 있지만 앙상블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란 말이죠."

-벌써 14년차인데 여자로서 여자 뮤지컬배우로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나요?

"따로 크게 고민은 안 해요. 바로 지금 현실에 충실하거든요(웃음). 제가 만으로 34세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때이고 앞으로 5년은 열심히 한다면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길게 내다보지는 않아요.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하루하루 열심히 하다보면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할 수도 있고, 그렇게 운명이 있을 수 있죠(웃음). 우선 정말 지금이 좋아요. '아리랑' 같이 정말 좋은 작품에 출연하는 지금이요. 무엇보다 그냥 아프지 말고 건강했으면 해요."

-'아리랑'이 공주 씨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나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미 전환점이 됐어요. 다른 뮤지컬과 비교하기 보다 그냥 '아리랑'은 '아리랑' 자체이거든요."

'아리랑' 9월5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송수익 서범석·안재욱, 양치성 김우형·카이, 수국 윤공주·임혜영, 득보 이창희·김병희, 감골댁 김성녀, 옥비 이소연. 6만~13만원. 신시컴퍼니·LG아트센터. 02-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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