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논술] 절세미인 양귀비, 300년 중국 통치한 당나라 흔들어

입력 : 2010.12.08 15:53

장훤 '괵국부인유춘도'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를 지나 중국 통일왕조를 세운 수나라(581~618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리한 영토 확장과 국가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벌인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618년, 새로운 통일왕조인 당나라(618~907년)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잇따른 주변의 민족과의 전쟁으로 채 40년을 넘기지 못한 수나라에 반해 당나라는 정치적인 안정을 최우선으로 꾀하면서 국력을 키워나갔다. 대외적으로도 그 위세를 떨쳐 300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까지 중국문화를 알리면서 최전성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훤‘, 괵국부인유춘도(􅦬國夫人遊春圖)’, 당(唐, 8세기), 비단에 채색, 52x148cm, 송(宋)대 휘종(徽宗, 1082∼1135)의 모사본, 요녕성 박물관 소장.
장훤‘, 괵국부인유춘도(􅦬國夫人遊春圖)’, 당(唐, 8세기), 비단에 채색, 52x148cm, 송(宋)대 휘종(徽宗, 1082∼1135)의 모사본, 요녕성 박물관 소장.
◆중국 미술사의 인물화 전통을 이어간 당나라의 인물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발전한 중국의 인물화는 4세기 무렵, 고개지(顧愷之, 346~408년)를 위시한 인물 화가들이 대거 등장해 대표작을 남기면서 크게 발달했다. 그리고 당나라 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인물화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다.

당(唐)대 인물화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세장한 몸과 가름한 얼굴표현의 인물화와는 반대로 풍만한 신체표현이 돋보인다. 흔히 살집이 많은 몸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둥근 얼굴을 담은 것이 전반적인 특징이다. 인물의 살집이 두텁다고 하여 이를 '후육형(厚肉形)' 신체표현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떠들썩한 연애로 유명한 양귀비(楊貴妃, 719~756년)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의 비(妃)로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춤과 음악에 뛰어나고 총명해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현종이 양귀비의 여색에 빠져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자, 결국 최측근이었던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현종은 촉나라 땅으로 피신했는데, 이 때문에 양귀비를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인)'이라고 칭한다. 결국 양귀비는 안사의 난(755~763년) 때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당나라 황제인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양귀비는 큰 권세를 누렸다. 그녀가 남방 특산물인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지방관들이 급마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또 현종이 난리를 피해 멀리 도망을 가면서도 양귀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당나라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 적었다. 풍만하고 농염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李白)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 역시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적인 사랑을 소재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유명한 당나라의 양귀비도 지금의 기준으로는 비만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양귀비의 세도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 한 점 남아있다. 주로 인물화, 그중에서도 미인도인 '사녀화(仕女畵)'를 주로 그린 장훤의 작품으로, 양귀비의 언니 괵국부인(��國夫人)이 봄나들이를 가는 장면을 그린 '괵국부인유춘도(��國夫人遊春圖)'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은 한껏 비단 옷과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여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한가로이 봄나들이를 즐기러 가는 장면을 담았다. 그 당시 황제의 후광을 등에 업은 양귀비 가족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짐작게 한다. 이 작품은 후에 중국 역사상 가장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황제, 송(宋)대의 휘종(徽宗, 1082~1135년)의 모사본으로 알려졌다.

더 생각해볼 거리

―당나라는 동아시아는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까지 정치·문화적 영향력을 미치며 중국문화를 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당나라의 대외적인 정치·문화적 교류 상황을 여러 가지 사례와 함께 생각해 보자.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