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출가 이윤택의 '성벽극장'
"5년간 밀양서 천막짓고 공연… 市에서 지원해준다기에 城 같은 극장 지어달라 부탁…
이 '배경'과 딱 어울리는 연극, 올해 안에 꼭 보여드리지요"
분명히 사람들 잔뜩 모아놓고 연극을 하는 극장이랬는데, 건물 안엔 무대도 객석도 없었다. 3층 건물 규모는 450평(1487㎡). 배우들이 먹고 자는 데 쓴다는 숙소가 10여개, 연습실과 의상실, 자료실만 있다. "그럼 여긴 극장이 아니라 사무실이나 연습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이윤택(58)은 빙글빙글 웃었다. "저기 무대가 있는데?" 그의 손이 건물 앞 널따란 운동장을 가리켰다. "이 건물은 무대 배경이고." 밀양시가 9억원, 문화체육관광부가 13억원을 후원해서 지었다는 이 극장(劇場)이 고작 극의 배경(背景)이라니? '성벽극장'은 여러모로 수상한 곳이었다.
◆무대도 객석도 따로 없는 극장
성벽극장이 서 있는 곳은 '밀양연극촌'이다. 1999년만 해도 이곳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엔 폐교(월성 초등학교) 하나만 서 있었다. 당시 서울 대학로 연극계를 휘어잡던 연출가 이윤택은 돌연 '연희단거리패' 소속 단원 60여명을 이끌고 "이제 서울을 떠나 밀양 폐교에서 먹고 자며 연극공동체를 꾸리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는 이랬다. "연극이란 무릇 여럿이 어울리고 떠들고 놀고 술 마시고 제사 지내는 가운데서 나오는 흥(興)이다. 서울 땅에는 그럴 시간도 공간도 없다. 연극의 본질을 찾으려면 허허벌판에서 시작해야 한다."
밀양이란 곳이 인구 11만명이 모여 사는 소도시란 점도 맘에 들었다고 했다. "제대로 된 공동체를 꾸리려면 지역 규모 자체가 너무 커도 문제가 생긴다. 주민들과 정을 나누고 살 수 있는 쉼터로는 밀양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꿈은 거창했으되, 현실은 돌밭이었다. 건물은 고사하고 당장 제대로 된 천막 하나 구해 공연하기도 쉽지 않았다. 1998년 경주문화엑스포가 끝나고 거둬들인 천막을 헐값에 샀다. 절반을 간이무대 만드는 데 썼고, 나머지는 배우들 먹고 자는 방 가림막으로 썼다. 그나마 2003년 여름 태풍 매미가 휩쓸면서 대부분 망가졌다. 밀양연극촌장이자 춤꾼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가 된 하용부 예술감독은 "정부 구호기금으로 나온 돈으로 슬레이트집을 대충 지어서 또 공연하고 살았다"고 했다.
연극촌이 자리 잡는 데 7년이 꼬박 걸렸다. 6년이 되던 해엔 처음 내려왔던 단원 60명이 2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윤택은 단원들과 연극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돌리고, 초·중·고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며 기금을 모았다. 점차 각종 지역자치단체 행사 연출 의뢰가 들어왔다. 2001년부터는 없는 예산으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벌였다. 전국에서 관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해엔 7000명이었는데, 2009년엔 3만1500명이 모였다. 참가 극단도 늘었다. 올해엔 일본·영국·독일 등 해외 3개국을 포함해 30개 극단이 참가했다. 인구 11만명짜리 소도시가 연극 덕에 작은 기지개를 시작했다.

연극촌 단원들이 폐교를 대충 터서 작업실로 쓰는 걸 본 시청측이 새로 사무실과 숙소를 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윤택은 "기왕이면 고성(古城)처럼 생긴 극장 모양으로 지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올해 5월에 연극촌 식구들의 성벽극장이 완성됐다. 지난 10년 동안 연극촌 식구들이 진통 끝에 쌓아올린 작은 성(城)이다.
이 희한한 극장은 그렇게 들어섰다. 성벽극장은 커다란 야외무대의 배경이자, 연극촌 사람들이 눌러 지내는 삶의 터전이다. "원래 연극이란 게 고대 희랍 사람들이 자기 살던 터전에서 놀면서 시작한 것 아닌가. 우리 연극촌 사람들이 일하고 밥 먹고 자는 곳을 극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연극다운 일이 어디 있겠나."
외양은 무덤덤하다. 화강암의 일종인 마천석을 쌓아 올려 둥그스름한 성벽을 만들고, 건물 안쪽엔 긴 통로를 내서 단원들이 연극을 할 때 분장하고 오가는 장소로 쓰게 했다. 3층 건물 외관을 군데군데 터서 베란다를 만들었을 뿐, 외벽에 장식 하나 없다. 이윤택은 "어떤 공연에도 어울릴 수 있도록 잡다한 겉치레를 모두 없앴다"며 "자꾸 뭐라도 더 달고 예쁘게 꾸며 보자고 꾀는 건축업자들 뿌리치느라 고생 좀 했다"고 했다.
◆풀벌레 소리가 음향 효과, 건물 뒤엔 20년치 자료가
성벽극장 주위엔 나무 난간으로 짜놓은 객석이 1500석이다. 난간을 옮기면 2000석, 3000석으로도 늘릴 수 있다. 최영 사무국장은 "이윤택 연출가가 관객에 따라 유동적으로 객석을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극장을 원했다"고 말했다. 극장 뒤편엔 작은 자료실이 있다. 이윤택이 1980대 중반부터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며 모아온 각종 연극 포스터·대본·팸플릿·참고용 영상자료가 빼곡히 들어찼다. 폐교의 목조 교실을 허물지 않고 활용해 제법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이윤택은 "연극이란 마법은 영화와 달리 무대 위를 떠나면 금세 연기처럼 흩어진다"면서 "이걸 어떻게든 붙잡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자료실"이라고 했다.
밀양에서 10년을 넘게 일했고 성벽극장까지 완성했다. 이윤택은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에서 망치질을 한다. 일단 성벽극장 배경과 딱 어울리는 새로운 연극을 손질해서 올해 안에 내놓을 생각. 극장도 하나 더 짓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영남지역 전통 가옥의 원형(原型)을 복원한 건물로 짓겠다. 완성시기? 글쎄, 일단 돈 먼저 모으고…."(웃음)
●이윤택은…
1952년 부산 출생. 서울연극학교 연극과 중퇴, 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과 졸업.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일하다 1986년 '연희단거리패'를 결성,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오구' '문제적 인간 연산' '어머니' 등이 대표작.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상(1998),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02), 한국뮤지컬대상 연출상(2006) 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받았다. 올해 5월엔 루마니아에서 '햄릿'을 공연해 12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내년엔 노년의 사랑을 그린 '꽃을 바치는 시간'(가제)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