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내면을 울리는 비극, 오페라 '돈 카를로'

입력 : 2008.12.01 03:15
"세상의 고통은 수도원까지도 따라오는 법, 너의 마음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조용해질 것이다."

아버지 필리포 2세가 사랑하던 여인 엘리자베타와 결혼하자, 왕자 돈 카를로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도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한 수도승은 비극적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렇게 나직이 읊조린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점차 파국을 향해 치닫는 '스페인판 사도세자' 이야기인 이 비극에는 전형적인 악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악역이 있다면, 운명일 뿐이다. 정사(正史)는 정신질환에 시달린 왕자 돈 카를로가 투옥되어 불과 23세에 감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문호 쉴러는 이 부자 갈등에 사랑의 이야기를 대담하게 포개놓았고 베르디는 주저 없이 대본으로 골랐다.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를 연이어 공연하고 있는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세원)이 29일 세종문화회관에 올린 작품이 바로 《돈 카를로》였다.
베르디의 오페라《돈 카를로》의 한 장면.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베르디의 오페라《돈 카를로》의 한 장면.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29일 무대에서는 남성 주역 3인의 호흡이 빛났다. 돈 카를로 역을 맡은 테너 박현재는 추스를 수도, 달랠 수도 없는 주인공의 애절한 마음을 청량한 고음에 담았고, 바리톤 한경석은 자칫 일관성을 잃기 쉬운 로드리고의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버지 필리포 2세 역의 베이스 김요한도 안정감 있게 극을 떠받쳤다. 오페라 극장이 아니라 다목적 대공연장인 탓에, 부분적으로 확성장치를 사용하고 무대 전환이 늦어 극 흐름이 자주 끊긴 점이 늘 아쉽다.

사랑했던 약혼녀 엘리자베타는 새 어머니가 되고, 왕자 돈 카를로를 사모했던 공녀 에볼리는 악녀(惡女)로 변한다. 돈 카를로와 로드리고가 힘차게 불렀던 '우정의 2중창'도 극중 계속 덧없게 변주되면서 비극을 암시한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아리아에 고통을 담아보지만, "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내게는 마음을 닫았다"는 필리포 2세의 처절한 독백처럼 그 누구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3막1장의 쓸쓸하기 그지없는 첼로의 저음처럼, 《돈 카를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오페라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디 시리즈는 내년 《운명의 힘》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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