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탄생 100주년 맞아 백건우·진은숙 등 기념 음악회

1941년 1월 15일, 독일령 실레지아의 괴를리츠 포로 수용소.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한겨울 수용소 무대에 5000여 명의 전쟁 포로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군 전쟁포로로 함께 수용돼 있던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Messiaen·1908~1992)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가 초연된 날이었다.
일반적인 4중주 편성(두 대의 바이올린·비올라·첼로)과는 달리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연주를 맡았다. 수용소에 함께 갇힌 음악가 4명이 연주할 수 있었던 악기들이기 때문이었다. 메시앙 자신도 조율이 제대로 안 된 고물 피아노로 연주에 참가했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메시앙은 훗날 "이처럼 대단한 관심과 이해를 보여준 무대나 관객을 보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올 가을, 한국에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메시앙을 재조명하려는 열기가 뜨겁다. 다음 달 11일 에드몬 콜로메르가 지휘하는 대전시향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시작으로, 작곡가 진은숙이 진행하는 서울시향의 현대 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rt;(10월 25·30일)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 개의 시선〉(11월 30일)까지 하반기 메시앙을 주제로 한 연주가 줄을 잇는다.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 오케스트라들이 앞다퉈 메시앙에게 음악적 헌사를 바치는 이유는 뭘까.
메시앙이 타계하기 2~3년 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시(詩) 낭독회가 열렸다. 마지막 순서로 나온 메시앙은 무대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시인이었던 어머니의 시를 직접 낭독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객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든이 다 된 노(老) 작곡가는 읽어 나가던 중에 목이 메어 몇 차례나 낭독을 멈췄다. 객석에도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백건우는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숨을 못 쉴 정도로 고요함이 감돌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끝을 맺었던 작곡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작곡가가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백건우는 아내인 배우 윤정희와 함께 메시앙이 40여 년간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트리니테 성당을 찾았다. 미사를 위해 연주를 마친 작곡가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건우는 "평생 그 성당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음악과 종교에 헌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제대로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고 했다.
백건우는 메시앙의 피아노 곡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 개의 시선〉을 비교적 일찍 만났다고 했다. 미국 뉴욕에서 유학할 당시인 1967년 메시앙과 부인 이본느 로리오(피아노)가 연주를 위해 뉴욕을 방문한 것이었다. 백건우는 "프랑스에서 대가(大家)가 온다는 소식에 가슴 설레며 공연장을 찾았고, 로리오 여사의 피아노 연주에 감명을 받아 '언젠가는 반드시 이 곡을 치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올해 작곡가 100주년을 맞아 백건우는 다시 이 곡을 연주한다. 백건우는 "연주에만 2시간 가까이 걸리고 테크닉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척 쉽지 않지만, 가톨릭이라는 믿음에 단단하게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메시앙의 작품이 지닌 힘"이라고 말했다.

지난 20일 진은숙이 작업하고 있는 독일 베를린으로 메시앙의 제자였던 영국 작곡가 조지 벤저민(Benjamin)이 찾아왔다. 진은숙이 직접 조리한 파스타를 함께 먹으며 둘은 대화를 나눴고, 벤저민은 메시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삶과 음악에 대해 그토록 긍정적이면서 따뜻했던 사람은 그 뒤로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진은숙은 "메시앙의 음악만 들어도 그의 신앙심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음악 언어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표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진은숙은 또 "흔히 작곡가 중에는 인간성 좋은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데, 몇 안 되는 예외 가운데 하나"라며 웃었다.
메시앙이 재직한 파리 음악원에서 슈톡하우젠, 노노, 피에르 불레즈, 크세나키스, 조지 벤저민 등 수많은 제자들이 공부한 뒤 20세기 현대 음악사에 모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진은숙은 "단 하나도 비슷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제자들은 음악적 개성이 강했지만, 메시앙은 그런 제자들의 생각을 모두 존중했다"고 말했다. 좋은 작곡가인 동시에 좋은 스승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진씨는 다음 달부터 서울시향의 현대 음악 시리즈인 '아르스 노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메시앙의 작품과 그 이전 세대 작곡가인 라벨·스크리아빈, 메시앙의 제자인 크세나키스와 불레즈의 곡들을 연주하고 해설한다.
진은숙은 "메시앙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는 작업은 20세기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올리비에 메시앙(Messiaen)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가운데 한 명으로 '현대 음악의 성인'으로도 불린다. 젊은 시절에는 기존의 복고적·낭만적 음악 어법에 반기를 들고 급진적 실험을 거듭했지만, 가톨릭 신앙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작품에 담아낸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산과 들에서 직접 새의 소리를 채집해서 〈이국의 새〉 〈새의 목록〉 같은 작품에 녹였다. 〈투랑갈릴라 교향곡〉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불레즈·크세나키스·슈톡하우젠·노노 등의 제자를 길러낸 명스승이며, 타계 직전에는 지휘자 정명훈과 따뜻한 음악적·인간적 교류를 나눴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