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6.03.30 15:08 | 수정 : 2026.03.31 15:00
비움과 축적의 미학, 최병소·오세열·최명영
[2026 ACF, AVENUEL ART FAIR]
4월 22일부터 잠실 롯데百 에비뉴엘
국내외 블루칩 작가 등 28인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한동안 침체돼 있던 국내 미술 경기가 점차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다. 지난해 미술품 경매 낙찰 총액은 1405억원으로 최근 3년 중 최고액을 기록하며 반등세를 보이고 있고, 데이미언 허스트(Damian Hirst), 조나스 우드(Jonas Wood) 등 메가스타 작가들의 전시가 연이어 한국을 찾는다. 국내 아트마켓에서는 여전히 블루칩 미술가에 대한 견고한 관심이 지속되며,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청년 작가를 향한 주목이 공존하는 가운데,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과 지형도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조선일보와 롯데백화점이 공동 주최하는 프리미엄 전시형 아트페어 ‘2026 ACF, AVENUEL ART FAIR’가 4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에서 개최된다. 유영국,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백남준, 최병소, 최명영, 이강소 등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얼굴들을 비롯해,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나라 요시토모(Yoshitomo Nara),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등 국제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큰손 작가들의 작품이 내걸린다. 이에 ‘ART CHOSUN’은 전시 개막을 앞두고, 국내외 현대미술의 생성과 전개 그리고 미래를 대표하는 참여 작가 28인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기획 시리즈를 8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무(無)의 수행자, 최병소
1차원의 선을 수없이 그으면 2차원의 면이 된다. 최병소(1943~2025)는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반복해 그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팔을 뻗는다. 신문은 현실이다. 최병소는 신문지를 접어 그리드를 만들고, 각 칸을 한 획의 선으로 채워 넣는다. 수없이 그어낸 탓에 찢어지고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깊고 촘촘한 검은 면은 본래 선이 모인 집합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검은 덩어리는 신문의 정체를 숨기고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작가가 선보인 ‘신문 지우기’ 연작은 1970년대 언론 통제의 시대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표현이 되기도 하며 답답한 현실을 초월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이상향이다.
1차원의 선을 수없이 그으면 2차원의 면이 된다. 최병소(1943~2025)는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반복해 그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팔을 뻗는다. 신문은 현실이다. 최병소는 신문지를 접어 그리드를 만들고, 각 칸을 한 획의 선으로 채워 넣는다. 수없이 그어낸 탓에 찢어지고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깊고 촘촘한 검은 면은 본래 선이 모인 집합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검은 덩어리는 신문의 정체를 숨기고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작가가 선보인 ‘신문 지우기’ 연작은 1970년대 언론 통제의 시대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표현이 되기도 하며 답답한 현실을 초월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이상향이다.
수행적 작업을 선보인 작가는 이전부터 여럿 있었다. 그들은 물감을 수없이 쌓아 올려 두께를 만들거나, 작고 세밀한 요소를 모아 하나의 형상을 완성시키기도 하는 등 정해진 대상을 미학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시도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최병소는 오히려 완성된 대상의 존재를 지워내는 ‘무(無)의 수행’을 지속해 마침내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이르고야 만다.
최병소의 작품은 2차원 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3차원 공간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무려 14m에 달하는 대형 작품을 제작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문다. 작가의 창조적 의지에 의해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노동을 예술적 실천의 공간으로써 재탄생시킨다. 현실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인간 개인의 실존과 그와 대립하는 외부의 압력을 검은 펜 끝에 모아 거침없이 그어낸다.
최병소는 ‘신문 지우기’ 연작으로 기교 없이 무한한 예술 세계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국내 최초의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고, 1977년 도쿄 센트럴 미술관,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1981년 브루클린 미술관과 서울 국립 현대미술관 등 주요 그룹전과 2012년 대구 미술관 그리고 2016년 프랑스 생떼띠엔 근현대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또한 아트바젤 홍콩, 프리즈 서울과 같은 아트페어에 출품돼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관심을 받으며 국제적 상업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최병소는 향년 82세로 2025년 작고했다. 인간 최병소는 찬란했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가 그려낸 선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 최병소는 생전 지난하고 고된 수행적 작업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매번 새로운 즐거움이다”라고 답했다.
◆동심 뒤 희로애락, 오세열
숫자 1, 2, 3, 4, 5, 6…. 오세열(81)의 화면에는 숫자와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오브제가 콜라주 형식으로 등장한다. 파란색, 노란색, 분홍색, 순진무구한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각지 못한 곳에는 과자봉지, 단추, 마침내는 일회용 용기의 비닐 포장을 제거하는 실링 칼이 불쑥 자리한다. 세상 모든 만물이 오세열의 물감이 된다. 얼핏 보면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없이 덧칠하고 다시 긁어낸 시간의 층이 화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려진 그림이라기보다, 시간이 쌓이고 깎이며 만들어진 하나의 지층에 가깝다.
숫자 1, 2, 3, 4, 5, 6…. 오세열(81)의 화면에는 숫자와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오브제가 콜라주 형식으로 등장한다. 파란색, 노란색, 분홍색, 순진무구한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각지 못한 곳에는 과자봉지, 단추, 마침내는 일회용 용기의 비닐 포장을 제거하는 실링 칼이 불쑥 자리한다. 세상 모든 만물이 오세열의 물감이 된다. 얼핏 보면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없이 덧칠하고 다시 긁어낸 시간의 층이 화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려진 그림이라기보다, 시간이 쌓이고 깎이며 만들어진 하나의 지층에 가깝다.
이토록 발랄한 재료와 색, 기법에도 숨은 의미가 있다. 오세열은 색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원색을 쓰지 않고 여러 색을 혼합해 ‘세월에 바랜 듯한 색’을 의도적으로 연출한다. 작가는 ‘설익은 겉절이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이 묻어나오는 묵은지’ 같은 그림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처음에는 밝고 단순해 보이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묘한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본 물건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오세열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작가가 남긴 흔적을 눈으로 좇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언제나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세열은 작품을 자신의 몸처럼 여긴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전쟁 이후의 시대를 지나온 한 인간의 서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작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삶의 단면을 화면에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긁어낸 자국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숫자는 희로애락을 상징한다. 작가는 어릴 적 쓰던 몽당연필로 숫자를 쓰는 연습을 했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주민등록번호부터 시작해 모든 사람은 숫자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고, 숫자에 울기도, 행복해하기도 하며 목숨을 걸기도 한다. 오세열이 느낀 세상사가 화폭에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세열이 몰두한 작업 세계 전반을 톺아볼 수 있다. 특히 10호 사이즈부터 100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작품이 내걸리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색 또한 다채롭다. 오세열의 작품은 물감을 쌓고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작업 특성상 실견했을 때 더욱 낯설고 매력적인 조형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숫자 옆으로 밀려나 미세하게 솟아있는 물감의 질감. 생뚱맞게 붙어있는 일상 오브제. 오브제가 전시장의 조명과 만나 만들어내는 생경한 그림자. ‘2026 ACF, AVENUEL ART FAIR’에 있다.
◆평면의 존재론적 발굴, 최명영의 평면조건
평면회화란 무엇일까? 다시. 평면이 평면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은 무엇일까? 최명영은(84) 캔버스 앞의 학자다.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회화에 대한 끝없는 실험과 호기심, 새로움을 향한 연구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다.
최명영은 평면의 조건에 대해 탐구한다. 개별 이미지의 개성을 제거하고 극도로 절제된 기본 요소만으로 회화의 존재 그 자체를 조명한다. 작가는 캔버스 아래에 수많은 고민과 개념을 쌓아둔 채 캔버스 위로는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거나 최소의 흔적만을 남긴다. 작가는 회화를 감정이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로 보며 여기서 발생하는 비조형성에 집중한다. 일평생 몰두해 온 최명영 작품의 근간이 되는 ‘평면조건’은 마치 지면 아래 들끓는 용암처럼 뜨겁지만, 정작 캔버스 위의 형상은 고요한 풍경이 지속되는 것만 같다. 최명영이 평면 위에 일궈내는 모든 행위는 작가의 내면세계와 일상의 리듬과 호흡에 궤를 같이하며, 이는 곧 질료로 대변되는 물질성이 정신적인 차원으로 환원된다. 때문에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마침내는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단조무미할 수 있겠죠. 작업의 요체가 되는 소지, 매체, 행위는 물론이고 펑퍼짐한 작품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변조의 드라마나 특기할 제스처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그저 캔버스에 일상적 삶 그 자체, 온갖 기억과 상념마저도 묻어가면서 그 과정의 추이에 따라 새로운 존재의 지평을 열고 싶을 뿐입니다.”
한편, 최명영은 세계 3대 아트페어로 불리는 ‘2024 테파프 뉴욕(TEFAF New York)’에서 작품이 ‘완판’되기도 했다. 또한 앤디 워홀(Andy Warhol), 장-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작품을 800점 이상 소장한 슈퍼 컬렉터 호세 무그라비(Jose Mugrabi)와 자코메티의 후원가로 알려진 슈퍼 컬렉터 애셔 에델만(Asher Edelman)이 최명영 작가의 작품을 구매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명영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이끈 오리진(Origin)과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A.G)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으며, 홍익대 미대 교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작가는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문의 (02) 724-6328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