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불어넣은 활기, 인도네시아의 아트 에코시스템 [2편]

  • 박수전

입력 : 2025.11.12 15:10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협주가 시작되는 곳   
리움미술관의 '2024 아트 스펙트럼 〈드림스크린〉' 전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관람매너를 지키며 조용히 전시를 둘러보던 중, 필자는 한 작품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전시공간에 나무로 지어진 바(Bar) 형태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설치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해 보였다. 우리 일행이 그 주변을 한참 서성이자, 한 청년이 다가와 자신을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하며 커피를 마시겠냐고 묻는다. 그리곤 바 안쪽으로 들어가서 향신료를 넣은 독특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웃음소리가 커질 즈음,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 다른 이가 나타나 전통 악기를 흔들며 춤을 춘다. 이렇게 시작된 즉흥연주는 침묵이 흐르던 전시장을 깨우고, 흩어져 있던 관람객들을 한 곳으로 모아 순식간에 공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제서야 작품 속 허전했던 곳이 사람들의 ‘에너지’로 채워져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울, 암스테르담, 욕야카르타(Yogyakart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국적 작가 그룹 '스파클링 탭 워터(Sparkling Tap Water)'의 〈바 바 바(Ba Ba Ba)〉 작품이었다. 이 젊은 작가들의 프로젝트는 국적을 초월해 있지만, 음식 나눔과 관계 맺기, 즉흥연주가 결합된 교류 방식을 실험한다는 점에서, 곧 소개할 인도네시아 예술계의 공동체적 가치와 흥미로운 교차점을 떠올리게 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룸붕 정신: 공동 헛간에서 시작된 예술 공동체   
'룸붕(Lumbung)'은 인도네시아어로 '공동 헛간'을 의미한다. 농촌 공동체에서 수확물을 함께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간 개념을 예술 활동에 접목한 것이 바로 ‘룸붕 정신’이다. 이 개념을 창립한 루앙루파(Ruangrupa)는 2000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결성된 아티스트 콜렉티브로서 큐레이터 개인이 아닌 집단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결과보다 과정에서의 참여를 중시하는 수평적 네트워크의 전시 모델을 추구한다. 202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15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루앙루파는 서구 중심의 미술 담론에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시선과, ‘룸붕 정신’에 입각한 집단 공유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전시 작품 일부에서 반유대주의 논란이 제기되어 비판과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루앙루파의 프로젝트에는 개인의 성공이 아닌 공동체의 번영, 경쟁이 아닌 연대, 소유가 아닌 공유를 추구하는 ‘룸붕 정신’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들은 네트워크 구축과 협업을 통해 생태계를 조성하고, 국내외 다양한 예술 단체들과 연대한다. 그리고 전시장을 작품 설치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실험실로 개방하며, 동시에 재활용 재료를 사용하여 지속 가능한 예술 실천에도 앞장선다. 그 밖에도 플랫폼 구축과 포럼을 통해 정기적인 이니셔티브를 실현하고, 공동체를 위한 집단 학습 공간 굿 스쿨(Gudskul)을 운영하여 미래세대를 위한 예술활동 및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축제의 계절, 자카르타에서 만난 루앙루파   
2025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자카르타 감비르 엑스포(Gambir Expo)에서는 루앙루파(Ruangrupa)의 25주년 기념행사 〈ruru25: Poros Lumbung〉가 뮤직 페스티벌 '싱크로나이즈 페스티벌(Synchronize Festival)'과 함께 개최되었다. 이러한 뮤직 페스티벌과의 협업은 예술이 제도적 공간을 벗어나 대중 문화와 만나는 접점을 만들어내고, 젊은 세대가 예술을 경험하고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ruru25: Poros Lumbung〉 전시장에는 루앙루파의 25년 여정에 대한 기록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중이었으며, 특히 8점의 주요 작품이 재조명되어 룸붕의 실천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관람객이 직접 티셔츠를 제작하며 예술 생산 과정을 함께했던 〈Kaos Project〉(2005, 이스탄불 비엔날레), 음식을 매개체로 관계 형성을 실험한 〈Lekker Eten Zonder Betalen〉(2003, 세메티 Cemeti Gallery), 그리고 자원을 공유하며 나눔의 의미를 탐구한 〈Hanya Memberi Tak Harap Kembali〉(2010)가 대표적이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Gerobak Bioskop〉(2011, 비엔날레 족자 Biennale Jogja)는 수레를 이동식 영화관으로 개조해 예술을 거리와 대중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였고, 〈The Kuda: The Untold Story of Indonesian Music Underground in the 70s〉(2012, 브리즈번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 Asia Pacific Triennale)은 인도네시아 언더그라운드 음악사의 숨은 장면을 복원하며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예술가 집단의 생존 전략을 탐구한 〈SIASAT〉(2011)과 대안적 학습 모델을 제시한 〈ruru gakko/Perguruan Tamanruru〉(2016, 아이치 트리엔날레; 2025 ArtJog 재구성)은 예술을 사회적 실천과 교육의 장으로 확장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The Singapore Fiction/Indonesiana〉(2011, 싱가포르 비엔날레)는 지역 정체성과 국가 간 관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아, 아시아 내부의 관계성을 예술적 언어로 탐구해 온 궤적을 드러냈다.
 
이번 〈ruru25: Poros Lumbung〉은 단순한 회고전을 넘어 루앙루파가 지난 25년간 구축해온 플랫폼들을 되살리는 '귀향'의 자리이기도 했다. ArtLab, OK. Video, Jakarta 32°C, rurukids, RURUradio, Rumah ruru 등 과거의 플랫폼들이 각각 큐레이션된 작품과 활동을 선보였으며, 관객들은 RURU Radio Lounge와 야외 영화관 Layar Tancap을 통해 영화 상영, 음악 세션, 공동체 모임을 경험할 수 있었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한국과 인도네시아, 예술로 나누는 대화   
룸붕 네트워크를 들여다보면, 함께 활동하고 있는 한국 아티스트 그룹도 눈에 띈다. '이끼바위 쿠르르(ikkibawikrrr)'는 소리와 이미지, 텍스트를 넘나들며 삶과 자연, 역사와 문화의 관계를 탐구하는 한국의 시각 연구 밴드이다. 필자가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에는 'ROH Projects'에서 새롭게 오픈한 실험적이고 현장 중심적인 예술활동을 위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b-side'에서 <해초 이야기> 전시를 선보이고 있어 반가웠다. 현장에 있던 관람객들이 제주 해녀합창단이 부르는 제주 아리랑 노랫말의 뜻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 가락에 실린 감성은 그 곳에 있던 모든 듣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 낸 듯 보였다.
 
ikkibawikrrr, Seaweed Story at b-side. Courtesy of ROH and the artists
ikkibawikrrr, Seaweed Story at b-side. Courtesy of ROH and the artists
 
인도네시아의 아트 커뮤니티를 꼭 현지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광주비엔날레 인도네시아 파빌리온은 인도네시아 예술가들의 ‘룸붕 정신’을 국내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2024년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인도네시아 파빌리온에서는 SAM 예술 및 생태 기금(SAM Arts and Ecology Fund)의 후원으로, 큐레이터 시아피아투디나(Syafiatudina)가 기획한 〈부서진 마음은 노래하네 (The Broken Hearts are Singing)〉전시를 선보였다. 전시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작가들은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도 공동체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대안적인 연대 방식을 탐구했다. 민주화와 인권의식의 역사적 맥락을 예술 담론으로 확장해온 광주는, 회복과 연대를 중시하는 인도네시아의 예술적 정서와 깊이 공명해 왔다. 2027년 제16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인도네시아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와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풀어내며 관객들과 대화를 만들어갈지 기대해보자.
 
Installation View of The Broken Hearts are Singing. Courtesy of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문화소비에 눈뜨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필자는 지난 몇 년간 인도네시아를 지켜보며, 문화 소비층이 빠르게 확산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2023년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미술 전시장에는 소수의 부유층 컬렉터와 예술관계자인 외국인만 보일 뿐이어서 대중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일년 뒤 같은 전시장에 방문했을 때에는 '히잡(hijab)'을 착용한 소녀들이 줄을 서서 전시를 관람하고, 소셜미디어를 위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방문한 인도네시아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음악, 예술, 패션이 융합된 문화소비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Synchronize Festival,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인도네시아는 약 3억 명의 인구를 보유한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다. 더욱이 중위 연령이 30세에 불과한 젊은 인구 구조를 가진 이 나라에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소비의 주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가 전통적으로 보유해온 '공동체 협업 경제'의 문화적 토대가 더해져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화소비 형태로 진화중인 것을 함께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 미술 시장은 폭발적 잠재력을 가진 곳임은 분명하다.
 
RURU25: Poros Lumbung, Gambir EXPO Kemayoran. 3-5 October 2025. Photography courtesy of ruangrupa
 
우리는 어떤 예술 생태계를 꿈꾸는가?   
인도네시아 예술계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공동체'다. 아트 자카르타가 보여준 기업과 예술가의 협업, 루앙루파가 실천해온 룸붕 정신,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가는 융합적 문화소비는 모두 공동체 협업을 기반으로 한다. 요즘 같은 ‘핵개인 시대’에 무슨 ‘공동체’ 타령이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물음이라고 해두자.
 
지난 몇 년간 한국 미술계는 빠른 양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현시점에서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미래의 시장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한국은 어떤 아트 에코시스템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필자 약력
박수전은 독립 큐레이터이자 에디터다. 노블레스 컬렉션 디렉터로 재직(2019년~ 2024년)했으며, 노블레스와 아트나우 매거진의 에디터로 활동했다. 상하이 웨스트번드의 아트나우 라운지에서 열린 한국 미술전과 아시아 미술전을 비롯해 다수의 전시를 총괄했으며, 현재는 문화예술기획을 통해 한국미술의 글로벌 교류를 확장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사는 2025년 10월 아트 자카르타와 루앙루파 25주년 행사를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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