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와 미술(6) - 미로 기관: 헤맴의 맴돔

  • 임야비 소설가·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단장

입력 : 2025.09.08 13:53

미로(전정) 기관의 해부학 / (www.healthtian.com/benign-paroxysmal-positional-vertigo)
 
[1]
미로는 순환한다.
인간은 헤맴의 반복으로 정위(定位)를 잡는다. 그런데 그 위치나 자세가 곧은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미로 기관. 귓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평형 기관. 인체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기관의 생김새가 미로라는 것이 헤맴의 맴돔을 단번에 완성한다. 그리고 미로의 일부인 세반고리관 속 림프액은 끝없이 맴돌고 있다. 이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 인체는 현훈(眩暈; Vertigo-어지럼증)이라는 발작성 미로에 빠진다. 헤맴을 맴돌아야 더 헤맬 수 있다. 헤매지 않는 존재는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맴도는 미로는 몸 안뿐만 아니라 몸 밖에도 펼쳐져 있다. 연결된 두 미로는 순환하며, 우리는 헤매며 존재한다. 
미로 기관에 의존해 미로의 글을 헤매보자. [3]으로 가자. 어차피 맴돌 테니 따르지 않아도 좋다.
 
[2] 
하등 생물의 미로 기관은 매우 단순하다. 인체의 미로 기관은 몸의 위치, 머리의 균형을 감지하고, 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더 복잡하고 정교한 미로로 진화했다. 
복잡한 미로 기관은 눈의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머리의 위치를 감지해 안구를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몸이 흔들리고 고개를 아무리 움직여도 한 곳을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미로 기관이다. 그래서 이 두 쌍의 작은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다양한 증상과 질병이 생긴다. 멀미가 대표적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처럼 반복되는 불규칙한 움직임은 전정기관 순환에 예기치 못한 혼란을 알으킨다. 그러면 이 감지 컴퓨터가 안구 움직임을 담당하는 뇌에 어마어마한 양의 스팸 메일을 보낸다. 그래서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면서 엄청난 구역이 발생한다. 멀미 방지제인 ‘키미테’는 야단법석으로 정보를 쏟아내는 미로 기관을 재우는 마취약이다. 
‘양성 발작성 체위성 현훈(BPPV)’이라는 병은 미로 기관의 컴퓨터 회로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버그가 발생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땅이 솟아오르고, 벽이 기울고, 천장이 빙글빙글 돈다. 미로 기관과 연결된 눈은 안구 진탕(Nystagmus)으로 덜덜 떨리고, 엄청난 불안이 동반된다. 
 
어지럼증 일러스트 / (www.yeongnam.com/web/view.php?key=20091113.010380815240001)
 
미로의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 어지럼을 느낀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우리가 어지럼을 표현할 때 미로로 표시한다는 사실 또한 미로적이다. 
인류의 먼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더 헤맨다면 미로 기관은 더 복잡한 미로로 진화할 것이고, 내비게이션이나 GPS 등의 기술 발달로 헤맬 이유가 사라진다면 미로 기관은 외길로 퇴화할 것이다. 
글이 막다른 길에 멈췄다. 미술에 관한 글인데 이상한 곳으로 흘러와 버렸다. 돌아가자. 
 
[3] 
미로에 얽힌 가장 먼 이야기는 신화다. 
미노스 왕, 파시파에, 포세이돈, 미노타우로스, 이카로스, 페르세우스, 아드리아네. 유명한 왕, 영웅, 괴물 그리고 신이 미로에 얽혀 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미로의 설계자 다이달로스다.
 
파시파에에게 암소 모형을 설명하는 다이달로스 - 폼페이 프레스코화 (c. 1C) / (Wikipedia) 빈 암소 내부로 들어가는 파시파에 - 줄리오 로마노 (c. 15C) / (Wikipedia) 어린 미노타우로스를 돌보는 파시파에 - 에트루리아 불키에서 발굴한 그리스 그릇 그림 (c. 4C B.C.) / (Wikipedia)
 
크레타를 다스리는 미노스 왕의 부인 파시파에는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사랑에 빠진다. 불륜을 감추고 싶던 왕비는 손재주가 좋은 천재 다이달로스에게 암소 모형을 부탁하고, 그 안에 들어가 황소와 관계를 맺는다. 파시파에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이 괴물을 가둘 미로를 주문한다. 그렇게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가 완성된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 작자 미상 (c. 16C) 프티팔레, 아비뇽 / (www.blog.naver.com/nowgnoy/222225300749)
 
이 미로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정말 없을까? 예외와 위반이 없는 이야기는 쉽게 소멸한다는 것을 신화는 잘 알고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예외와 위반이 있어 현재까지 미로가 적자 생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미로를 빠져나와 생존한 세 명이 있다. 호기심 앞에서 꼬인 미로는 현기증을 유발한다. 빠른 증세 해소를 위해 [5]로 가자.
 
[4-1] 
신화 속 라비린토스는 인류의 무의식 속에 오묘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정교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단어 ‘Labyrinthus’에는 고어의 고풍스러운 신비함까지 얹혔다. 그런데 상업 광고는 이를 미묘하게 비틀어 큰 웃음을 자아낸다. 
 
라비린토스 양곱창 양념구이 전문점 로고 / (www.blog.naver.com/laputaa/60100830194) 돼지의 소화 기관 / (www.artstation.com/artwork/oO68Rm)
 
곱창집 로고 디자인이다. 하긴 창자만 한 미로도 없을 것이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이 집의 곱창 맛은 매우 오묘할 것으로 사료된다. 
 
[4-2] 
액션 페인팅의 화가 잭슨 폴록이 1943년에 파시파에를 그렸다. 
 
파시파에 - 폴록 (1943) / (www.jackson-pollock.org/pasiphae.j네)
 
미로지만, 얼핏 사람과 소가 보이는 게, 얽히고설킨 미로 같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사정이 나아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모비 딕’이었다고 한다. 폴록의 무의식 속에는 바다의 미로와 미노타우로스의 미로가 구분될 수 없다. 고래의 창자를 파헤치려는 에이헙은 바다의 미로를 헤매고, 욕망에 눈이 멀어 소의 창자 속으로 기어들어 간 파시파에는 미로를 잉태했을 것이다. 미로는 순환한다. 그리고 자동기술법(automatism)으로 미로를 헤맸던 폴록의 무의식은 파시파에라는 미로를 잉태했다. 
상업광고와 폴록의 미로. 일단 여기까지만. 자동 기술 연상의 막다른 길이다. 
 
[5]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온 영웅이다. 
 
미궁 속의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 번-존스 (1861) / (Wikimedia)
 
현명한 여인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쥔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온다. 하지만 영웅은 연인 아리아드네를 낙소스 섬에 버리고 홀로 아테네로 돌아가 왕이 된다. 
 
다이달로스, 이카로스, 크레타 섬의 미로가 있는 부조 - 작자 미상 (c. 17C) 앙투완 비브넬 뮤지엄 / (Wikimedia) 이카로스의 추락 - 루벤스 (1636) / (Wikimedia)
 
탈출에 성공한 다른 두 명은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다. 
아리아드네에게 실타래 탈출법을 알려준 죄로 아들과 함께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힌 천재 다이달로스. 너무 완벽하게 만든 바람에 탈출이 막막했고,  출구가 아닌 하늘로 빠져나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이른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부자는 미로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탈출하자마자 죽음의 미로 속으로 추락한다. 
 
그렇다면 불세출의 영웅 테세우스와 천재적인 명장 다이달로스는 미로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일까? 아니다. 탈출에 성공한 테세우스는 연인을 버리고 부왕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왕이 된 후로도 아마조네스 원정, 잇단 아내들의 죽음과 아들 히폴리토스의 죽음 그리고 하계(저승)까지 내려간 모험 등 끊임없이 모진 미로를 헤매던 테세우스는 결국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미궁 탈출 이후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다이달로스도 굴곡진 인생을 헤맨다. 집요하게 추적하는 미노스 왕의 눈을 피해 시칠리아로 몸을 숨긴 미궁 탈옥범은 목숨이 달아날 수많은 위기를 겪다 끝내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서 생을 마감한다. 
테세우스와 다이달로스가 빠져나온 미로의 출구는 삶이라는 더 크고 복잡한 미로의 입구였다. 이렇게 미로는 끝없이 순환한다. 
 
[6]
미로가 영원히 순환한다는 것을 깨달은 화가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C. Escher; 1898~1972)다. 
 
계단의 집 - 에셔 (1951) / (Wikimedia) 볼록과 오목 - 에셔 (1955) / (Wikimedia) 높음과 낮음 - 에셔 (1947) / (Wikimedia) 인쇄 갤러리 - 에셔 (1956) / (Wikipedia)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어딘가 대칭이고, 어디선가 딱 맞아떨어지는 에셔의 작품은 매우 수학적이다. 실제로 수학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자 개인 교습까지 받은 에셔는 평면 분할, 차원 변환, 무한 공간, 위상 수학 등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수학자 로저 펜로즈(R. Penrose; 1931~)를 비롯한 전 세계 수학자들은 열광했다.
 
뫼비우스 띠 2 - 에셔 (1963) / (Wikimedia) 뫼비우스 띠와 펜로즈 삼각형 / (Wikipedia) 폭포 - 에셔 (1961) / (Wikimedia)
 
개미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영원히 맴돌 수밖에 없으며, 펜로즈(Penrose) 삼각형을 응용한 폭포는 무한 동력인 양 영겁의 추락을 반복한다.
에셔의 시각에서 ‘헤맴의 공간 - 미로’는 영원의 공간을 순환한다. 
 
[7]
누에보 탱고의 창시자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헤맴의 시간 - 미로’를 청각화한다. 
1989년 발표한 앨범 ‘The Rough Dancer and the Cyclical Night (거친 댄서와 순환하는 밤)’에는 총 1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첫 곡(Prologue Tango Apasionado)과 가운데인 제7곡(Prelude to the Cyclical Night part 1) 그리고 마지막 곡(Prelude to the Cyclical Night part 2)이 같은 음악이다. 
 
화가 에셔가 ‘헤맴의 공간’을 시각화했다면, 작곡가 피아졸라는 ‘헤맴의 시간’을 청각화한 것이다. 즉, 시간의 미로 속에서 헤메는 밤의 음악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이 앨범은 유리와 거울로 된 미로와 같다. 피아졸라는 오래된 멜로디와 익숙한 제스쳐로 탱고 댄서처럼 격렬한 포옹과 회전을 반복한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순환한다.’ 
 
음악 평론가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앨범에 부친 평이다.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매력적인 미로와 순환의 테제를 놓칠 리 없다. 피아졸라의 이 앨범 역시 존경해 마지않던 아르헨티나의 대문호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이었다. 
당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필요하다면 [9]로 직진하자. 
 
[8] 
카프카는 헤맴을 문학화한 작가다. 대표작 ‘성’, ‘소송’, ‘굴(窟)’은 기괴한 미로다. 카프카의 미로는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카프카가 설계한 미로를 끝없이 맬돌 뿐이다.
철학자 벤야민은 문예 비평에 ‘프란츠 카프카’,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에서 무한으로 증식하는 미로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망각과 단념 그리고 붕괴의 명랑이라는 현대적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는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도는 ‘의식의 미로’다. 소설의 첫 장을 여는 주인공의 이름은 ‘Stephen Dedalus(스티븐 디덜러스)’. 그 어원은 신화 속 Daedalus(다이달로스)다. 영민한 조이스가 미로의 미학을 놓칠 리 없다.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율리시스 신화에서 계몽을 끄집어낸다. 두 철학자에게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신화 속 미로를 헤매던 율리시스의 모험은 이성으로 계몽되었다고 착각하는 현대인의 방황일 뿐이다.
 
카프카, 벤야민, 조이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외에도 많은 문인과 철학자가 미로에 천착했지만, 늘 그렇듯 막다른 길에 봉착한다. 이때 보르헤스를 찾아야만 한다. 헤매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새롭고 아름다운 미로로 헤매는 자를 인도한다. 
 
[9]
보르헤스는 소설이라는 공간에 헤맴의 미로를 축조한 다이달로스다. 
그의 두 대표작 ‘픽션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바벨의 도서관’, ‘원형의 폐허들’, ‘죽음과 나침반’ 그리고 ‘알렙’의 ‘두 왕과 두 개의 미로’, ‘아베로에스의 추적’, ‘아벤하깐 엘 보하리, 자신의 미로에서 죽다’,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보르헤스와 미로와 순환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시간의 마법사 보르헤스는 순환의 미로를 시로 노래한다. 
 
피타고라스의 까다로운 제자들은 알고 있었지. / 우주와 인간이 순환한다는 것을.
숙명적으로 미립자가 황금빛 성마른 아프로디테, / 테베인들, 아고라를 복제한다는 것을.
 
켄타우로스는 미래에 통말발굽으로 / 라피테스족의 가슴을 짓밟으리.
미노타우로스는 로마가 티끌로 화할 때, / 악취 풍기는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
 
모든 불면의 밤이 세세히 순환하리라. / 이 글을 쓰는 손도 동일한 배에서 또다시 출생하리라.
강고한 군대가 심연을 건설하리라. / (에든버러의 데이비드 흄이 똑같은 말을 했네.)
 
시간 단위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듯, / 제2의 주기에서 우리가 그렇게 회귀할지는 모르겠네.
허나 피타고라스의 암묵적인 순환이 / 밤이면 밤마다 우주의 한 지점에 나를 위치시킴을 아네
 
(중략)
 
아낙사고라스가 해독한 오목한 밤이 순환하네. / 변함없는 영원이 내 육신에 순환하네.
그리고 계속되는 한 편의 시에 대한 기억(계획?)이: 
“피타고라스의 까다로운 제자들은 알고 있었지……”
 
- 보르헤스의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중 ‘순환하는 밤’
(민음사, 우석균 옮김) 
 
결코 계몽될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신화가 던진 미로의 수수께끼를 간파했다. 그는 미로처럼 복잡한 공간은 결국 시간마저 왜곡한다는 사실을 깨우친 ‘까다로운 수학자’였다. 미로(공간)의 헤맴은 영원히(시간) 순환한다. 보르헤스는 이 테제를 비튼다. 그는 공간을 순환시키고, 시간을 헤매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현기증을 창조해 냈다. 장님 보르헤스는 먼 옛날 다이달로스가 창공에서 내려다본 미궁을 봤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에셔가 만든 과학과 예술, 실체와 가상의 흐릿한 경계가 피아졸라의 순환과 맥놀이 하며 보르헤스의 글에 닿는다. 시공간을 초월한 보르헤스의 미로에서 미술-음악-문학은 펜로즈 삼각형을 이룬다.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 삼각형은 귓속 미로 기관이 삼각 측량한 정위를 보란 듯이 어지른다.
 
[10] 
왕가위 감독은 에셔의 폭포, 피아졸라의 탱고, 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영화 속에 집어넣는다. 장국영(보영 역), 양조위(아휘 역)를 주연으로 내세운 1997년 작 ‘해피 투게더’다.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동성 커플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체류기다. 둘은 피아졸라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며, 이구아수 폭포를 여행하려 한다. 추락을 순환하는 폭포는 보영이 반복하는 대사이자 영화의 주제를 담은 문장 ‘우리 다시 시작하자’와 맞물린다. 미로의 순환이다.
출구인지 입구인지 모를 미로의 끝이 희미하게 보인다. [12]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닫힌 출구’가 궁금하다면 살벌한 아래쪽 미로를 들려도 좋다. 
 
[11] 
영화 ‘Cube’ 시리즈 (1997~2004)는 에셔의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영화 ‘Cube 2’ (2002) 이미지 / (www.blog.naver.com/kmysu/222672548859) 입방 공간 분할 - 에셔 (1961) / (Wikimedia)
 
영화는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입방체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여러 인물을 통해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등장인물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방체를 헤매지만, 순환을 살인 도구로 삼은 미로는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한 인간의 죽음은 내부의 미로 기관을 정지시킨다. 헤맴의 끝이자, 맴돔의 멈춤이며 일종의 미로 탈출이다. 하지만 영화는 아름다울 철학과 심오할 미학을 팽개치고 오로지 생사 불안과 폐소 공포에 온 초점을 맞춰버린다. 
Dead End. 자칫 막다른 길에서 횡사할 수 있으니, 발길을 돌리자. 
 
[12] 
미로와 순환의 세련된 혼란은 현대 예술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특히 자신이 갇힌 미로에서 피살된 살인마 미노타우로스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33년 스키라와 테리야드가 창간한 초현실주의 잡지의 이름은 ‘Minotaure(미노타우로스)’였고, 피카소가 표지 디자인을 그렸다. 
 
초현실주의 잡지 ‘Minotaure’ 창간호 표지 - 피카소 (1933) / (Wikipedia) 소녀에게 이끌리는 눈먼 미노타우로스 - 피카소 (1934) / (www.blog.naver.com/utis0me/222353742332) 미노타우로스 왕 - 피카소 (1958) / (www.blog.naver.com/utis0me/222353742332) 미노타우로스 가면을 쓴 피카소 - 에드워드 퀸 (1959) / (www.artsupp.com/en/artists/edward-quinn/picasso)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미노타우로스를 그렸는데,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을 지도 위에 이어 그리면, 그것은 미노타우로스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보르헤스와 함께 시공간의 미로, 순환하는 미로를 미궁 속에서 깨우친 최초의 미노타우로스였다. 
 
미궁의 왕 미노타우로스와 신화가 제거된 미로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밖의 미로에서 더 헤매려면 [13]으로, 안의 미로를 맴돌려면 [14]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13] 
20세기 이후 수많은 화가가 자기만의 미로를 창조했고, 현재까지 개성 넘치는 미로가 축조 중이다. 그 수가 무한으로 발산하는지라, 미로 작품들을 세워 미로의 미로를 만들 수 있을 지경이다. 
 
부두와 바다 5 (바다와 별이 빛나는 하늘) - 몬드리안 (1915) / (www.moma.org/collection/works/33419) 새로 발견된 미궁 - 훈데르트바서 (1957) / (www.mutualart.com/Artwork/Frisch-gefundenes-Labyrinth) 미궁 - 해링 (1989) / (www.artchive.com/artwork/labyrinth-keith-haring-1989/) 미궁 - 캐링턴 (1991) / (www.sybaris.com.mx/10-works-to-meet-leonora-carrington/) 사슬 미로 - 플라이슈너 (1978~1979) / (www.deldeobarzune.com/richard-fleischner-projects) 미로 - 쿠렐렉 (1953) / (www.aci-iac.ca/art-books/william-kurelek/key-works/the-maze/) 미궁 연작 (런던 지하철역) - 월링거 (2014) / (www.dandad.org/awards/professional/2014/graphic-design) 친숙한 고통 2 - 김범 (2008) / (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8275) 여섯 개의 크레타 미로 - 조 틸슨 (1977) / (www.goldmarkart.com/blogs/discover/joe-tilson-labyrinth)
 
이 정도면 각 작품의 입구와 출구를 이어 영원히 순환하는 미로를 만들 수 있다. 
순환의 극한값인 무한 루프가 엄습한다. 늦기 전에 뒷걸음쳐야 한다. 
 
[14] 
밖의 미로에서 안의 미로로 돌아오자. 
충분히 헤맸다면 비단 미로 기관뿐 아니라, 인체 전체가 겹겹이 포개진 미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맛본 곱창집 로고는 소화기계고,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은 온몸을 순환하는 혈관계다. 뇌이랑은 헤맴의 자궁이며 여기서 뻗어 나온 신경계는 다중 우주처럼 미로를 재생산한다. 골수는 뼛속에 은폐된 미로고, 피부 주름은 늙은 미로가 할퀸 시간의 문신이다. 
 
삼사라(輪廻) - 라바라마 (2013) / (www.rabarama.com/scultura-samsara)
 
안의 미로, 인체의 미로를 가장 심오하게 축조한 작품은 이탈리아의 조각가 라바라마(Rabarama; 1969~)의 ‘Samsara’다. 번역하면 ‘윤회(輪廻)’다. 산스크리트어 ‘संसार(saṃsāra)’의 어원은 ‘정처 없이 헤매다, 원을 그리며 맴돌다.’이다.
인간은 인체의 미로에 갇힌 채 영원히 헤매는 존재다.
 
[15] 
1899년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이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헤집어 놓고, 190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런데 인류는 딱히 멀미를 느끼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이 크게 바뀐 건 없다. 인류는 시공간의 태곳적부터 안의 미로에 기대어 밖의 미로를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 에셔 (1953) / (Wikipedia)
 
엉클어지고 비틀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헤맴의 순환으로 정위(定位)를 잡는다. 그런데 그 위치나 자세가 곧은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모두가 안과 밖, 공간과 시간에 빈틈없이 가득 채운 미로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글과 길이 곧아진다. 미로의 출구는 곧 다른 미로의 입구며 두 문 사이에 틈은 없다. 
삶은 헤맴의 맴돔이며, 헤매고 맴돌수록 미로는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수많은 막다른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을 터. 
이제 다시 [1]로 가자.
미로는 순환한다.
 
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 총체극단 '여집합' 단장.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기획 및 연출을, 여러 극단에서 극작과 연출을 맡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철학으로 유리알 유희를 하며 여러 유형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클락헨'(2020), 기록문학 '그 의사의 코로나'(2022), 소설 '악의 유전학'(2023)을 출간했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