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토 아르디가 펼쳐놓은 인도네시아적 개념미술

  • 김현 기자

입력 : 2025.04.09 10:02

마루토 아르디 개인전 ‘Get the job done’
5월 3일까지 용산동 상히읗

‘Get the job done’ 전시 전경. /상히읗
 
책에서 시작된 무늬가 전시장 벽면의 나사가 되어 지속되고 작품과 연결된 투명 호스는 바닥까지 늘어진다. 전시 공간를 적극 이용해 작품과 사물의 한계를 탐구하는 작가 마루토 아르디(Maruto Ardi)의 개인전 ‘Get the job done’이 5월 3일까지 용산동 상히읗에서 열린다.
 
상히읗은 평소 전시공간을 새롭게 활용해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해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Parallel Walls’은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을 먼저 고려하는 아르디의 작업 세계를 잘 드러낸다. 빨간색과 연두색 물이 채워진 호스로 연결된 두 개의 책이 상히읗의 두 전시 공간에 각각 설치되는데, 이는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는 물의 물리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호스 안의 물은 책의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하도록 제작되었는데, 이때 책의 이미지가 마치 자(ruler)에 새겨진 세밀한 눈금처럼 기능하며 각각의 공간에 설치된 두 개의 책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은 분리된 두 공간을 유연하게 오가며 작품을 감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본인 만의 해석에 다다르게 된다.
 
‘Get the job done’ 전시 전경. /상히읗
 
인도네시아에서 나고 자란 아르디는 인도네시아적 사고방식인 ‘아칼-아칼란’을 기반으로 한다. ‘아칼-아칼란’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즉흥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을 뜻하며, 인도네시아의 건설 노동자들이 정해진 규범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재료를 활용해 도구를 직접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기술적 정밀성보다 실용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이 사고방식은 아르디의 작업 전반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The Everyday’는 ‘나사책’ 연작의 변주이자 확장된 작업으로, ‘하우스오브카드’ 구조에서 착안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책’은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아, 하드커버 책이 반쯤 펼쳐져 세워지는 받침대 구조로 작동한다. 작가는 책이 무너지지 않도록 책등을 볼트로 고정시키고, 책표지에는 야간조명 아래 거리의 물건을 담은 사진을 음각으로 새겨넣었다. 이는 책이 가진 물리적 특성을 재해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불안정한 구조와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한다.
 
‘Get the job done’ 전시 전경. /상히읗
 
한편, 마루토 아르디는 시스템과 하드웨어에 대한 애착을 바탕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실험을 전개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어법을 구축해왔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이로써 공간을 활성화 시키는 작가는 사물을 흔히 알고 있는 용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풀어놓는다. 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 즉 사물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난다는 사고와 연결되며, 개념미술의 핵심원칙인 ‘아이디어가 곧 기계(idea-as- machine)’라는 개념과도 맞닿아있다.
 
아르디는 2016년 반둥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Bandung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미술학위를 받았다. 주요 개인전은 반둥 Selasar Sunaryo Art Space(2021); 스위스 바젤 Liste Showtime, ROH Projects 기획(2021); 자카르타 Jalan Surabaya 66(2019) 등에서 개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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