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3.10 15:46
‘ACF(Art Chosun Focus)’
국내외 동시대 참여 작가 27인 15회 연재
3월 19일부터 3월 23일까지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컬쳐파크

※편집자주
ART CHOSUN, TV CHOSUN 미디어 양사가 공동 주최하고 ACS(아트조선스페이스), 프로젝트더스카이가 공동 기획한 ‘ACF(Art Chosun Focus)’가 3월 19일부터 3월 23일까지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컬쳐파크에서 열린다.
참여 작가는 27인으로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이 선정돼 행사 기간 중 전시된다. 이에, 본지는 각 작품을 관람하기 전, 미리 알아두면 좋을 작가의 작업관을 요약해 설명한다. 해당 기사는 전시 시작 전까지 15회에 걸쳐 연재된다.


삼각형 구조물이 모이면 세계의 축소판이 된다. 작가 전광영(81)은 수천 개의 삼각형 스티로폼을 논어, 맹자, 법전이나 소설 등의 내용이 담긴 한지로 감싼 뒤, 퍼즐처럼 이어붙여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때로는 평면적으로 미적 경험을 선사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입체적 형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전광영은 197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 유학 시절, 한 때 추상표현주의에 심취해 있던 작가는 자신의 경쟁력을 한국 고유의 정신과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1982년 귀국했다. 작가는 곳곳의 미술관, 박물관, 민속촌 등을 다니며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불현듯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한약방에서 보았던 풍경과 물건을 보자기로 감싸는 우리의 문화였다. 두 소재 모두 전광영에게 한국의 정(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약방 천장에 빼곡히 달린 약재 봉투는 전광영의 화면에서 삼각형의 구성 요소로 새롭게 태어났고, 이를 하나하나 한지로 감싸는 작업 방식은 보자기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전광영은 한국인 최초로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과 모스크바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제 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로 선정된 그의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ed)’은 총 1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으며,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홍콩 M+, 호주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중국의 하우 아트 뮤지엄(How Art Museum) 등 세계적인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강소(82)의 조각은 흙을 아무렇게나 툭툭 쌓거나 허공에 던져 만들어지는 우연적 흙덩어리와 같다. 사람을 빚어내는 재료로써 혹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물질로써 여겨지는 ‘흙’을 던짐으로써 예술품을 빚어내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나 내던져지는 흙은 엄연한 주체로서, 던져지는 과정에서의 방향, 속도, 중력, 그리고 건조 과정에서의 햇빛, 바람 등 우연적 요소들과 유기적인 결합을 이뤄내며 흙은 스스로의 존재성을 결정해야만 한다. 이로써 작가는 도외시되던 동양적 전통에서의 흙의 의미와 그 생명성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이강소는 학창시절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미술의 매력을 체감했다. 또한 고등학교 때부터 동료를 모아 전시를 만들어 작품을 발표하고, 현대미술 정보교류를 위한 스터디 모임을 구성하며 미술계에 입문했다. 1970년 신체제 그룹을 결성하여 미술계에 두각을 드러냈고, 1973년 공식적인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1979년까지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 동료 작가들과 함께 서구의 미술사와 다른 한국현대미술 고유의 철학적, 미술적 태도를 찾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비디오, 판화, 영상 등으로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전복할 수 있는 매체 실험을 함께 진행했다. 이는 매체를 넘나들며 개념과 예술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지금의 성향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이강소는 전통적인 조각의 방법론에 현대적인 사고를 덧입혀 ‘던져’ 만든 조각에 집중하며 동시대 사회에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작가의 'Untitled' 연작 조각은 주물 작업으로, 토련기에서 나온 사각형 혹은 원기둥의 흙의 모양을 그대로 쌓아 올려 중력에 의해 쳐지게 하거나 흙을 허공에 던져 각각의 덩어리들이 서로 기대고 구겨져 독특한 또 하나의 흙덩이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대로 포착했다. 그는 몇 개월의 걸친 자연적 건조 과정 속에서 수분의 증발, 수축, 갈라짐 등 흙 본래의 속성으로 일어나는 변형을 내버려 둔다.
또 다른 조각 연작 'Becoming'은 세라믹 작업으로, 'Untitled' 연작과 마찬가지로 던져진 흙덩이의 우연적 형상을 그대로 유지해 낸 것이다. 이 작업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요소는 바로 색채다. 이강소는 흙이 가진 본래의 다양한 색채가 자유로이 나오게 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한다. 경주 흙을 1050도로 소성해 나오는 붉은색, 그 이상으로 소성했을 때의 초콜릿색, 산청의 흙을 1230도로 소성하면 나오는 자연 그대로의 노란 흙색, 또 중국에서 생산된 전통적 백자 흙을 1230~1270도로 소성해 은은히 발산되는 청백색의 맑고도 깊은 백색 등 모두 작가가 흙의 종류, 유약, 온도 등 흙의 유기적 에너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탄생했다.
이후 이강소는 제9회 파리비엔날레(1975), 제2회 시드니비엔날레(1976), 제10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1976), 제14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77) 등에 참여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사유의 과정에 천착하며 회화작업에 몰두하였는데 끊임없이 변하는 대상의 속성과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상황을 인식하여,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배제한 그리기 실험을 지속해 왔다. 작가는 1980년대 초 추상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집, 배, 오리, 사슴의 등의 구상을 거쳐, 1990년대 이후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상상적 실재를 이야기하였고, 이는 2000년대 이후 글자와 추상의 경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작업 시리즈로 지속됐다.

“이미지에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자연 속에 살다 보니 보고 사는 걸 그릴 뿐이죠. 자연에는 소재가 넘쳐납니다. 작가는 언제나 발상과 표현의 싸움의 연속인데, 자연을 그리는 작가야 많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유년의 감각을 재료 삼아 특유의 반(半) 추상화에 몰두해온 오세열(80)은 낙서하듯 소꿉장난하듯 그려낸 화면에 어린아이의 동심을 담아낸다. 아이와 노인의 마음이 공존하는 화폭인 셈이다. 그래서 때론 대체 무슨 인과관계인가 싶은 천차만별 이미지가 뜬금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암호처럼 낙서처럼 화폭 위를 부유하는데, 이는 열린 결말을 시사하며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으로 확장된다. 그는 직설적인 어조 대신 은유의 화법을 구사하며 화면 속 기호에는 똑 떨어지는 정의가 없으며 폭넓은 사유와 해석의 여지를 열어준다.

작가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숫자에도 별 뜻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화면 위 빼곡한 숫자들은 어린 시절 칠판에 쓰인 산수 문제 같다가도 달력 속 날짜로 보이기도 한다. “숫자에도 별 의미 없어요. 숫자에 얽힌 사연이 하루에도 무수할 만큼 우리가 숫자를 떠나 살 순 없기에 화면에 숫자를 쓰는 거죠.”
이들 기호나 도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색감이라고 오세열은 강조한다. “두세 가지 색을 혼합해 세월에 바랜 듯한 색감을 내고자 합니다. 제가 그런 톤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 그림엔 원색은 없습니다. 제 그림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색감을 눈여겨봐야 할 경우가 더러 있죠.”

그의 콜라주 역시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다. 길거리에 버려진 물건이나 작은 조각을 주워와 오브제로 삼는다. “쓰레기였지만 제가 다시 역할을 부여해 존재감을 불어넣은 셈이죠. 세상엔 버릴 게 없어요. 그러다가 뜻밖의 작업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 행위가 참 재밌더라고요.” 배달음식을 시키면 비닐 뜯을 용도로 함께 오는 실링칼도 그의 재료였다. 포장지나 색종이를 오려 붙이기도 한다.
캔버스를 자신의 신체와 같이 생각하는 작가는 그가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을 화면에 오롯이 드러낸다. 다만 은유적으로 숫자, 기호, 선(線) 등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는 붓보다도 면도날과 못을 더 자주 사용하는데, 바탕색을 올리고 이를 면도날이나 못 따위로 긁어내 표현하는 것이다. 붓으로 하게 되면 날카로움과 선명함이 무뎌져 바탕색과 혼합돼 또렷이 나오지 않는단다. 면도날로 선을 그을 때면 재밌을 수 없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어린아이처럼 무의식적으로 긋고 낙서하는 거죠. 내 본능 같은 겁니다. 그냥 좋아요.”
이렇듯 긁어내길 거듭하면 기저에 깔린 다양한 색이 침윤하게 되는데, 볼 때마다 다른 색을 보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게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겉절이보다 묵은지가 좋아요. 그림에는 깊이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 묵은지 같은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볼 때마다 작품이 다르게 느껴지는 깊이랄까요. 방문객이 전시장을 5분 만에 둘러보느냐, 1시간 동안 머무느냐는 작가에게 달렸죠. 작가가 이를 책임져야 합니다. 제 그림이 오랫동안 보고 싶게끔 하는 작업이길 바랍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