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6.07 15:18
7월 14일까지 종로구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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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폴 발레리(Paul Valery)와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e)를 읽으며 글이 아닌 그림으로 시를 쓴 작가가 있다. 가장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 본질을 구현해야한다는 시인의 의식을 그림으로 가져와 물감으로 표현한다. 김기린(1936–2021) 이야기다.
김기린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7월 14일까지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개최하는 김기린의 세 번째 개인전이자 작고 이후 첫 개인전이다. 작업 초기부터 2021년 작고할 때까지 지속한 작품 40여 점과 직접 창작한 시와 사진 자료 등의 아카이브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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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린의 작품 세계를 집약하는 핵심은 작가의 내면을 외부에서부터 인식할 수 있도록 캔버스 화면 위에 물감을 매체로써 다뤘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내면과 세계의 이면을 엄격하게 선별된 함축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시인의 시 창작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얇은 붓으로 격자 그리드를 완성한 뒤, 수행하듯 굵은 붓으로 원을 수십 번 덧칠한다. 작가는 매번 같은 붓으로 같은 점을 찍지만, 미세한 손 떨림, 호흡, 온도와 습도 등의 외부환경까지 같을 수는 없어서 원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잔잔한 음의 진동이 촉각적으로 전해지며 음악적인 맥락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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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1층에는 검정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김기린의 1970년대 대표작 ‘흑단색화’와 2000년대 까지 지속된 ‘안과 밖’ 연작이 내걸린다. 2층은 생전 전시에서 공개한 적 없는 한국 전통 창호지를 연상시키는 유화 작업을 중심으로, 유학 시절 작가가 직접 창작한 시가 공개된다. 또한 전성기 시절의 소품은 물론, 전업 미술품복원가로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의 파리 시기 아카이브 자료 또한 함께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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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프랑스로 이주하여 디종 대학교(현재 부르고뉴 대학교, Université de Bourgogne)에서 미술사를 수학했으며,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로저 샤스텔 (Roger Chastel) 교수 아래서 미술 지도를 받고,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 서정적인 추상 회화를 시작하여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평면성을 추구하는 회화 작업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흑단색화 작업만을 소개하는 파리에서의 개인전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면서 작가는 한국의 단색조 회화 운동에 영향을 끼치며, 모노크롬 작업을 심화시켜 나갔다.
한편, 김기린은 갤러리현대, 우종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제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도쿄도립미술관, 도쿄센트럴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가졌고, 대표작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우종미술관, 리움미술관, 파리시립현대미술관, 디종미술관 등 국내외 다양한 기관에 소장돼 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