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5.22 15:32
설치 작품 비롯해 회화 등 작품 20여 점
6월 29일까지 신사동 페로탕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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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배경 위 흰 두루미. 흰 배경 위 검은 두루미. 각자의 세상에 사는 다른 개체가 세상의 경계에서 입을 맞추고 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Gregor Hildebrandt)의 개인전 ‘스쳐가는 두루미’가 6월 29일까지 신사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 제목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러시아 감독 미하일 칼라토조프(Mikhail Kalatozov)의 1957년 개봉 영화 '학이 난다'에서 차용했다. 이 영화는 사랑에 빠진 젊은 커플이 이른 아침 모스크바의 황량한 거리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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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과도 일맥상통하며 매우 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작품 ‘Umatmen erwünschte Lüfte dir die beruhigte Flut (Breathe in the Desired Air on the Calm Tide)’은 제목을 읽기도, 해석하기도 어렵다. 해석하자면 ‘잔잔한 조류에서 갈망하던 공기를 마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Friedrich Holderlin)이 1801년 자연의 신성과 고대 그리스의 영광에 헌정한 송가 ‘Der Archipelagus’의 한 행에서 차용한 것이다. ‘Der Archipelagus’은 힐데브란트의 출생지인 바트 홈부르크에서 두루미를 모티프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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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그렇다. 그러나 차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품 속 화면은 서로 대립하는 백조와 흑조를 주제로 구성되는데, 이는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The Swan, Group IX/SUV, No. 1’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검은 배경에 있는 백조와 흰 배경에 있는 검은 백조의 부리와 날개 끝이 맞닿은 모습인데, 클린트에게 백조는 선과 악, 낮과 밤, 남성과 여성 등의 이분법으로 인해 극도로 양극화된 세상에 대한 극복을 상징했다.
이에, 힐데브란트는 클린트의 화면을 뒤집어 백조를 흑조로, 흑조를 백조로 그렸다. 바로 수없이 쌓아 올린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위에. 각 카세트테이프는 마돈나 등 실존하는 다양한 가수의 앨범으로 이뤄져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차용인 셈이다. 정리하자면, 제목은 독일의 시, 화면은 스웨덴 그림, 배경은 전 세계 가수의 카세트테이프 케이스에서 빌려온 셈이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배경지식에 따라 더욱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해지며 복합적인 작가의 미학과 함께 개별 이미지가 가지는 상징까지 포착할 수 있다.
힐데브란트의 음악에 대한 애호는 잘 알려져 있다. 테이프, 레코드와 같은 음향 매체를 작품 창작에 활용할 뿐만 아니라 템포, 리듬, 강조, 멈춤, 반복, 운율을 아우르는 음악의 모든 영역을 활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멜로디는 수백만 번에 걸쳐 되풀이되고, 기억된다. 또한 작가는 음악적 재능을 갖춘 이들을 후원하며, 직접 만든 레이블을 통해 엄선된 음악가들의 바이닐 앨범을 정성스럽게 제작해 발매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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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1층에 형형색색 쌓아 올려진 기둥 작품 ‘Rhein’은 현대 조각의 위대한 고전인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끝없는 기둥’에서 영감을 받았다. 자세히 보면 다채로운 색상의 LP판을 구부려 그릇처럼 쌓아 올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색상은 작가 파트너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스웨터의 줄무늬 패턴을 모방한 것으로,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모티프로 차용했다. 이렇듯, 힐데브란트의 작품은 단순히 프레임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건축적인 종합 예술 작품처럼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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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힐데브란트는 카세트테이프와 바이닐을 주재료로 삼아, 이들을 콜라주하거나 조립하여 미니멀하면서도 낭만성을 지닌 회화, 조각, 설치 작업을 선보여왔다. 작가가 사용하는 아날로그 저장 매체의 광택 있는 표면 너머에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인 음악과 영화가 숨어있다. 그의 회화와 조각 작품 제목은 음악이나 영화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대중 문화 매체의 사용은 우리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을 모두 불러일으킨다. 또한, 작가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떼어내기’ 기법은 캔버스에 붙인 양면 접착테이프에 자성 코팅을 문질러 복잡하고 찾기 어려운 가루 패턴을 추적하는 것으로, 기억의 과정을 은유한다. 끝없는 차용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자아내는 힐데브란트. 어쩌면 그는 세상에 없던 노래를 만들어내는 작곡가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노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가장 현대적인 디제이일지도 모른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