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3.29 11:40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회화 작업
“몸과 영혼이 머무르는 집”
4월 3일부터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




“화가는 자기 몸을 세계에 빌려주며, 이로써 세계를 회화로 바꾼다”
‘몸의 현상학’으로 유명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남긴 말이다. 메를로퐁티는 몸과 정신이 구분돼 있다는 이원론적 개념을 거부하고 둘의 융합으로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론을 내세운다. 메를로퐁티는 ‘화가의 시선은 신체에 얽혀있다’는 사유를 바탕으로 세계를 절대적으로 보여줄 시선이란 없고, 저마다의 몸에 얽혀있는 눈의 관점에 따라 각자가 해석하는 시선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화가는 몸으로 세계를 그려낸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세비가(CEVIGA·64)의 작품은 메를로퐁티의 이론과 많은 부분 닮아있다. 작가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건과 시간이 몸에 축적되고 발효됐다가 추상적인 드로잉으로 뻗어나가 작품이 된다고 말한다. 즉 작가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그려낸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발화된 몸의 언어인 셈이다. 화면을 구성한 형형색색의 곡선은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얽히며 때로는 중앙에 응집하기도, 때로는 가장자리에서 존재감을 발하기도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가 그간 지나온 경로를 추적하게 한다. 또한 높은 채도의 색감은 본연의 에너지를 체감하게 하고, 그와 대조를 이루는 배경은 작가의 체화된 기억을 눈 앞에 선연하게 펼쳐놓는다. 그래서 작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기능하기보다는 작가의 분신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모습은 때로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롭고, 압도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세비가(世琵嘉)를 동양적 사유로 환원해 “영원히 함께하는 아름다운 연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세비가의 개인전 ‘WAY HOME: 낙타는 물길을 안다’가 오는 4월 3일부터 4월 27일까지 서울 중구 아트조선스페이스(ACS)에서 열린다. ‘낙타는 물길을 안다’, ‘고양이가 물고 온 노란 풍선’ 등을 포함한 신작과 근작이 내걸린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작가를 만나 작품과 작업 과정에 대해 물었다.


─이번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Home’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몸이 곧 영혼이고, 영혼이 곧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함께하는 공간이 집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서의 집은 실체가 있는 실제 집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조금 더 존재론적인, 은유적인 집이죠. 그 집 안에서 다양한 상상이 일어나고, 그걸 채색화한다면 작품이 되겠죠. 몸과 영혼은 계속 저를 따라다니는 듯합니다. 몸과 영혼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감각하니까요. 몸을 떠나서는 빛도 느끼지 못할 테고, 바람도, 다양한 감정도 느끼지 못할 테죠.
─또 ‘낙타는 물길을 안다’라는 제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낙타는 본능적으로 땅 아래의 물길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거기서 영감을 받아서 저 역시 내가 가야 할 곳, 가장 근원적인 나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단순히 목적지 같은 곳을 상징하는 건 아니에요. 제 정신세계의 회귀, 작품으로 보면 순수했던 작업 세계로 돌아가는 듯한 회귀를 뜻하죠.
─결국 이번 전시는 내면의 근원적인 곳으로 향하는 길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으시나요?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기 전, 사유가 먼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어느 물체를 볼 때, 저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피어올라요. 과일을 누르면 과즙이 튀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생활하다가도 오감이 먼저 반응을 일으키고 활발하게 움직여서 상상을 촉발시키는 것 같습니다. 어떨 때는 음악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꽃일 수도, 냄새일 수도 있어요. 제가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기보다는 사물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듯합니다. 그 후 저는 작업을 시작하죠.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물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변 사물과 상호작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선과 선 사이, 점과 점 사이, 그 모든 회화적 반응이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점을 촘촘히 이어가다 보면 선이 되는 것처럼 제 주변 모든 사물과 저는 서로 연결되며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아트조선스페이스에 방문해 공간과 기후를 고려한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네 맞아요. 저에게는 이 공간이 좋은 느낌을 줬습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나, 제가 전시를 하게 될 때의 날씨 같은 것을 상상하며 작업을 이어나갔어요. 또 아트조선스페이스 골목길로 올라오는 길에 노란 풍선을 물고 있는 고양이를 봤는데, 제게는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출품작 중 ‘고양이가 물고 온 노란 풍선’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답니다.
─이번 신작 제목에 동물이 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동물도 다 그들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물을 바라보지만, 동물 역시 저를 바라보죠. 저는 인간의 일방적 시선에 대해 경계하는 편입니다. 동물도 다 자신의 시선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토대로 인간과 상호작용하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먹고 고통받는 동물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평소 생각해 오고 경험한 주제 의식이 제목뿐만 아니라 선 하나에, 점 하나에 자연스레 농축돼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자유로운 색감과 형상에서 역동성과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저도 아직 근원에 대해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작업을 할 때 색과 색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를 발견하고는 합니다. 작품에 쓰인 재료와 색도 마찬가지로 상호작용하며 발산하고요. 그건 보통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색과 색처럼 저 역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색으로 서로 다른 감정과 무게를 표현한다고 밝히셨어요. 이번 신작 시리즈에서는 분홍색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어머니의 품을 연상했습니다. 피부처럼 따뜻하기도 하고, 안정감이 들기도 하죠. 따라서 이번에 작업을 할 때는 캔버스 색을 분홍색으로 칠한 다음, 그 위에서 발견되는 작은 아름다움을 포착해 작품을 그려나갔어요. 또 멀리서 보면 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가까이 가면 따뜻한 품에 안기는 것 같은 경험을 주고자 했습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지구가 나를 품고 있는 듯한, 그런 따뜻한 색부터 시작해서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동안 하신 작업을 볼 때 즉흥적이고 경쾌한 추상의 형태가 눈에 띄었는데, 혹시 구상의 요소도 있나요?
사실 저는 리얼리즘과 추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멀리서 보면 그저 사과로만 보이죠. 근데 더 가까이서 보면 사과 껍질에 있는 색과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가깝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나 입자가 추상의 형태로 보일 거예요. 더욱 강조된 리얼리즘이 추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얼리즘이든 추상이든 결국엔 다 같다고 봅니다.
─과거 작품을 보면 추상이라고 해도 색이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어요. 작가님을 변화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요?
매일매일 변화를 느낍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도 똑같지 않거든요. 일정한 것 같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변화가 있습니다. 저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지구와 기후도 마찬가지죠. 세계에서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날씨가 같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해요. 나무는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잎은 떨어지거나 돋아나고, 산의 색은 시시각각 달라져요. 환경과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의 작은 알갱이라는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를 멀리서 보면 하나의 점으로 보일 거예요. 그러나 그 점 안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가 있죠. 마찬가지로 모래 한 알, 소금 한 알, 설탕 한 알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그 작은 한 점을 내가 들여다보고 상상하며 작업을 이어나간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