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1.02 17:07
카이 루이 헝·다니엘 첸·김서울·양하
그룹전 ‘투명한 창, 유리 테이블’
20일까지 갤러리 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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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전에서는 다양한 작가가 가진 제각기 다른 개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 공간에서 통일된 주제로 벽에 내걸려 표현하고자 하는 차이점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룹전은 갤러리의 기획 안에서 각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구축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포인트가 된다.
카이 루이 헝(Cai Ruei-Hengㆍ35), 다니엘 첸(Daniel Chenㆍ27), 김서울(36), 양하(30) 작가 4인은 투명함을 중심으로 작가별 형식과 표현법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그룹전 ‘투명한 창, 유리 테이블’을 20일까지 갤러리 기체에서 가진다. 투명함이라는 키워드와 동시에 제시된 창과 테이블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을 연결하고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통로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거나 그려낸다는 의미의 투명함과는 거리를 둔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카이 루이 헝, 다니엘 첸, 김서울, 양하는 구상, 추상, 반추상 등 작업의 주축을 이루는 양식을 정하고, 조건 지은 틀 안에서 실험을 지속하며 자신만의 표현법을 모색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캔버스는 긴 시간 이어져 온 미술의 흐름 안에서 특정 형식을 선택하고 작가 특유의 시각 언어로 치환함으로써 차별성을 부여하는 작업대가 되는 셈이다. 그 위에서 작가는 내면의 정서나 현실 세계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하고 회화의 조건 자체를 고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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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루이-헝은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현실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화면에 담는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이나 유령 형상은 현실 세계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욕구를 드러내는 매개체다. 작가는 의자 팔걸이에 끼어 있거나, 손에 들려 씻기는 개의 모습처럼 주도권을 잃은 피동적 상황을 주로 설정한다. 아크릴 물감을 흘리고 붓질의 질감을 여러 겹 쌓아서 색이 화면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막으며 불투명함을 유지해 다소 무섭고 기괴한 분위기까지 준다. 또한 작품에 따라 비정형의 모양으로 캔버스를 오려내 장면에 몰입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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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첸에게 회화는 자신의 경험을 되새기는 무대다. 이를 위해 작가는 추상을 주요 형식으로 정하고 점묘법을 확장해 출발점으로 삼는다. 작가는 사소한 일상이든, 깊은 잔상이든 다채로운 질감의 점, 선, 면의 형태로 캔버스 위에 구현한다. 전시에 출품된 신작 중 ‘Clouds and Two Trees(2023)’는 미국 이민 후 가족이 처음 소유하게 된 집의 마당 사이로 올려다보던 하늘에 대한 기억과 느낌을, ‘The Grass Floats in a Pink Sky(2023)’는 몇 년 전 상해로 거취를 옮긴 후 찾은 항산의 노을 진 풍경을 담았다. 이처럼 작가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 안에서 감정과 기억을 포착해 화면에 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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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울은 회화를 이루는 물감, 붓, 캔버스, 액자, 질감 등 다양한 요소를 살피고 재구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2021년 전후로 발표했던 ‘Filbert Family’ 연작을 다시 소개한다. 이 연작은 격자, 마름모, 타원, 꽃 문양에서 형태와 패턴을 추출해 필버트 붓으로 그려 화면을 구성했다. 또한, 형광, 분홍 등 회화에서 잘 쓰지 않는 색을 채택하거나 야광 반사 테이프를 붙여 재료의 경계를 적극 확장하기도 한다. 작가의 회화는 토대를 이루는 물성과 개념을 관성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산물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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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연한 빛의 부드러운 정물이나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접한 폭발 장면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양하의 작품이다. 작가의 회화적 언어로 변환된 폭발의 이미지는 각종 미디어로 비춰지는 현실의 폭력이 얼마나 얇고 무심하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다만, 작가는 구체적인 배경이나 상황을 부여해 서사성을 심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멀어져 이미지 그 자체에 집중한다. 이로써 대상의 목격과 인식 과정에서 벌어지는 복합적 모순을 보여주며 회화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또한, 양하는 아크릴을 묽게 바르고 유화 물감을 올려 미끄러지는 듯한 재료의 반발성을 강조하거나 색연필과 스프레이로 덧 그리기도 하면서 질감을 다변화하는데, 이는 갤러리 기체의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과 어울려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장은 3층까지 있으며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문턱을 넘어가는 등의 입체적인 전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각 작품이 가진 다층적인 매력을 더욱 자세히 발견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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