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틈을 파고드는 남자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3.12.27 17:55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혁필기법으로 구현한 ‘디지털리티’ 회화
내달 20일까지 학고재

P23002-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94x130cm. /학고재
P23030-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94x130cm.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디지털과 아날로그, 유동성과 침잠성, 수직과 수평, 그리고 창조와 파괴. 김영헌의 회화에는 이질적인 두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붓과 나이프를 동시 도입하는데, 붓의 아날로그적 부드러움과 유연함, 칼의 급격함과 디지털적 성격이 한 화면에 고스란히 혼재하게 된다. 붓 줄기는 한데 이어지다가 도중 끊기고 단절되기도 하며 다시 이어지기를 거듭한다. 반면, 나이프는 똑 떨어지는 날렵함으로 층층이 쌓인 색면이나 붓 줄기 위에 생채기로서 나타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두 속성이 서로 줄타기하며 공존하는 지점이다. “마치 잡음과도 같은 거죠. 디지털에는 잡음이 없지만, LP판과 같은 아날로그에는 잡음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아날로그적 풍부함과 단칼에 끊기는 급격함이 교차하며 제 화면을 완성합니다.”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김영헌 작가가 전시장에서 출품작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윤다함 기자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났지만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김영헌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틈으로부터 가능성이 비롯된다고 믿으며, 그 균열에서 기인하는 새로움을 모색하는 탐구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혁필기법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필법을 고안해 내 붓 줄기 고유의 선(線)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듯이 구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연한 줄무늬가 일견 사후에 다듬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한 번의 붓질로 구축된 것인데, 폭 3밀리미터짜리부터 50센티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붓을 다채롭게 사용한다. 유화 물감의 뻑뻑한 성질을 극복해 일필(一筆)로 내려긋기 위해서는 농도와 습도 등 세심한 외부 환경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한 번 지나간 붓의 헤어라인에는 색색의 선들과 몸의 떨림 등 미세한 표현이 살아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붓 줄기가 단 하나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Frequency)’가 내달 20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린다. 그의 대표 연작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Electronic Nostalgia)’ 신작 22점이 내걸리는 자리다. 작가는 동시대 회화의 특징은 디지털리티(digitality)에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TV 브라운관의 노이즈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서의 버퍼링, 혹은 영상을 볼 때 빨기 감기로 넘기는 행위에서 오는 시간 감각의 왜곡 등과 같이 인공적이며 자연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감각이 그러하다. 그는 이러한 ‘디지털리티’를 연작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를 통해 회화로 구현한다.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00x80cm.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출품작 중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2023)를 눈여겨봄 직하다. 동심원 형상으로 김영헌의 기존 회화와는 다소 다른 형태가 눈에 띈다. 흡사 나무의 나이테 혹은 휘몰아치는 폭풍의 눈을 연상하는 이 그림은 작가의 실험적인 시도 속에 탄생한 것으로,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는 LP판을 떠올리기도 한다. 작품의 중심부를 보면 서로 대비되는 색들이 방사(放射)하면서 충돌과 화합을 반복한다. 충돌 속에서 조화를 빚어내는 김영헌의 화법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김영헌의 화면에는 혁필 줄무늬와 팔레트 나이프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색면이 대립적으로 병치되며 묘하게 어긋나며 또 맞아떨어지는 예측 불가 결말이 전개된다. 그의 그림은 회화적 요소 사이의 틈을 오가며 추상적 상상을 발굴하는 여행과도 같다. 
 
P23024-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3, 린넨에 유채, 122x122cm.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윤다함 기자
 
한편, 작가는 1964년 논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런던예술대학교 첼시 칼리지 회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동물의 날고기로 만든 인체 형상이나 실험용 쥐를 사용한 설치 작품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다. 영국에서 수학한 후 회화로 전향한 그는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을 오가며 국제 미술계에 이름을 각인해 왔다. 현재 뉴욕, 프랑스, 홍콩을 주요 무대로 삼아 작품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2022년 학고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학고재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 전경. /학고재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