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과거의 선명한 기억을 발굴하는 ‘마뉴엘 솔라노’

  • 김현 기자

입력 : 2023.12.22 13:05

국내 첫 개인전 ‘파자마(Pijama)’
어린 시절 소재로 한 회화, 설치, 영상 작품
내년 1월 14일까지 종로구 사간동 페레스프로젝트

빅 버드(Big Bird), 2023, acrylic on canvas, 180x150cm. /페레스프로젝트
 
마뉴엘 솔라노(Manuel Solano·36)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이미지를 발굴하고 조합한다. 이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땅 속에서 끊임없이 홀로 흙을 퍼내는 일과도 같으나, 마침내 채굴해낸 그의 이미지는 선명히 빛난다. 작가는 자신의 과거를 퍼내고 추적하며 복원하는 이 일련의 과정으로써, 화면을 마주보는 이로 하여금 지나간 향수, 명랑함, 슬픔 등 다채로운 추억과 감정을 환기하게끔 한다. 그러나 정작 솔라노는 앞을 볼 수 없다. 그는 26세의 나이에 시력을 잃었다.
 
또 다른 자스민 의상(El otro Disfraz de Jazmín), 2023, acrylic on canvas, 180x150cm. /페레스프로젝트
‘또 다른 자스민 의상’(2023)의 디테일컷. 못과 핀이 박힌 자국을 볼 수 있다. /김현 기자
 
솔라노는 시력을 잃고 캔버스 위에 못과 핀을 박고 줄을 둘러 채색할 칸을 나눈 뒤 손으로 짚어가며 그리는 방법을 개발해 촉각적 시각화를 시도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이 보이는데, 이는 못과 핀을 박은 자국으로 작업 방식을 짐작케 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단순히 작가의 어린 시절을 재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기법적으로 신체의 어려움을 극복한 현재의 당당한 모습과 자기표현에 대한 에너지를 강조한다.
 
이러한 특성이 드러난 솔라노의 신작이 서울 사간동 페레스프로젝트에 내걸렸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 ‘파자마(Pijama)’에서는 어린 시절과 관련된 기존 작업을 확장시킨 신장 페인팅을 포함해, 어릴적 작가의 모습을 촬영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한 영상 작업도 공개한다. 1990년대 아날로그 비디오 감성을 담은 영상 작품 '암컷 새끼 오리(La Patita)'와 어렸을 적 부모님의 침대에서 놀던 작가의 자화상 ‘파자마(Pijama)’, 장난감과 사탕이 가득 든 멕시코 전통 종이 인형과 싸우는 장면의 ‘빅 버드(Big Bird)’에 이르기까지 스쳐 지나간 과거를 포착해 회화적으로 재해석한 작가의 주제 의식을 볼 수 있다.
 
마뉴엘 솔라노 개인전 ‘파자마(Pijama)’ 전경. /페레스프로젝트
마뉴엘 솔라노 개인전 ‘파자마(Pijama)’ 전경. /김현 기자
파자마(Pijama), 2023, acrylic on canvas, 180x150cm. /페레스프로젝트
 
솔라노의 또 다른 특징은 캔버스의 가장자리가 거칠고 불규칙하게 마감된 것인데, 이는 시각적, 감정적 효과를 강화하고 기억이 지닌 비선형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처럼 캔버스 곳곳에는 작가의 고유성을 담은 흔적이 있는데, 이를 직접 살펴보는 것도 또 하나의 감상 요소다.
 
작가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흔적과 경험을 발굴해 캔버스 위에 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작업 과정이 된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평소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세계를 목도하며 얻는 감각은 삶을 다채롭게 한다.
 
‘시력을 잃으면서 내면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는 솔라노는 바뀐 환경 속에서도 예술적 실천을 이어가며 국제 미술계의 관심을 얻었다. 영국 던디 현대미술관(Dundee Contemporary Arts), 런던 카를로스/이시카와(Carlos/Ishikawa), 리스본 현대미술관(Kunsthalle Lissabon), 브라질 상파울루의 피보(Pivô) 등에서 개인전을, 프랑스 아를 술타나 섬머 셋(Sultana  Summer  Set),  베를린 위 알 빌리지(We  are  Village),  브라질 상파울루 멘데스우드 DM(Mendes Wood DM), 노르웨이 오슬로의 헤니 온스타 아트센터(Henie Onstad Art Centre)에서 그룹전을 가졌다. 작가의 작품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푼다치온 아르코 마드리드 컬렉션(Fundacion Arco Madrid Collection), 푸에르토리코 베레즈디빈 컬렉션(Berezdivin Collection)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1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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