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은 양자의 ‘촉매작용’으로부터”… 임충섭의 ‘사잇’ 예술 세계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3.12.13 17:40

개인전 ‘획’, 14일부터 갤러리현대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윤다함 기자
임충섭 작가가 ‘수직선 상의 동양 문자’(2000) 앞에 서서 작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윤다함 기자
 
한국과 미국,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여백과 채움, 평면과 입체, 추상과 구상 등과 같이 상반된 두 개념을 오가며 양자적이며 양가적 성격의 작업에 몰두해 온 임충섭(82)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두고 ‘사잇’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두 장소나 대상 간의 거리나 공간을 의미하는 ‘사이’와 그것을 연결하는 ‘잇다’를 결합한 단어로, 작가는 ‘사잇’ 존재로서 자신의 작품이 대립되는 양쪽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그 둘의 관계를 이어주는 ‘촉매작용’을 일게 하는 일종의 ‘촉매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임충섭 고유의 예술 세계는 어린 시절로부터 기인하는데, 충북 진천에서 나고 자란 그가 매일 마주했던 자연 풍경과 일찍 세상을 떠난 모친에 대한 향수는 중추적인 동인(動因)이다.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흙, 2000-2023, Mixed media with soil, 가변설치. /갤러리현대
 
그중에서도 설치작 ‘흙’(2000~2023)에서 이러한 점이 도드라진다. 흡사 피라미드를 연상하는 유적지를 옮겨 놓은 듯한 구조물과 그 위로 소복하게 쌓인 흙 그리고 수직적으로 쌓아 올린 사각의 흙덩이로 이뤄진 이 작업에서 임충섭은 자연과 동양을 상징하는 곡선을 부여함으로써 서구 건축의 직선적 양식을 파괴한다. 인위적인 현대 건축물과 흙이라는 자연의 원천 두 사이의 묘한 조화와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충섭에게 흙은 어린 시절의 자연과 어머니로 연결되는 매개체로 작용하며 자연, 유년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암시한다. 더불어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깨달은 생명의 유한성과 자연의 순환, 인간의 한계에 대한 통찰이 함께 침윤하는 듯하다.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길쌈, 1999-2023, Mixed media with Korean cotton threads, 가변설치. /갤러리현대
 
임충섭 개인전 ‘획(劃)’이 14일부터 내년 1월 21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73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2023년까지 40여 년의 작업을 살피는 자리다. 서양의 현대미술과 동양의 서예 예술의 조형성 사이를 다각도로 실험하며 한국 미술계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임충섭의 미적 성취를 조명하며 자유형 캔버스와 드로잉, 발견된 오브제, 고부조, 아상블라주, 영상과 결합된 키네틱 설치 등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는 설치 신작 ‘흙’을 포함한 연대별로 다채롭게 내걸리는데, 특히 키네틱 설치작 ‘길쌈’(1999~2023)을 눈여겨봄직하다. 자연과 문명의 조화로운 만남을 건축적인 접근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전통 베틀의 형상을 띠고 있다. 구조물 아래 바닥에는 작가가 직접 촬영한 하와이의 달과 작업실 근방의 허드슨 강물 영상이 반복 재생된다. 베틀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직물을 짜고 있는 듯한 구조물과 하와이의 달 풍경 영상이 교차하며 문명과 자연, 동양과 서양 간의 공존을 위한 중간자 ‘사잇’ 존재 역할을 수행하는 작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무제 - 발견된 오브제들, 2000년대-2020년대, Mixed media on found objects, 가변설치. /갤러리현대
 
작가는 ‘모든 사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말에 영감을 받아 길거리에서 주워 온 버려진 물건들, 이를테면 자전거 안장, 운동화 끈, 쇳덩이 등을 비롯해 나뭇가지와 흙 따위를 소재로 삼은 ‘무제 - 발견된 오브제들’(2000년대~2020년대)도 내보인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이들 오브제는 20년에 걸쳐 작가가 맨해튼 길거리를 산책하며 발견, 수집한 것들이다. 모든 사물에 기억과 역사가 있다고 믿는 임충섭은 발견된 오브제들을 채색하고 조각한 뒤 새롭게 나열해 새로운 오브제의 서사를 만들고자 한다. 이는 보는 이를 자연 또는 인간과 문명, 개인의 기억과 현재 사이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서와 감각의 여정으로 이끈다. 
 
전시 타이틀 ‘획’은 한지에 그어지는 서예의 획과 더불어 동양 철학의 ‘기’, 나아가 작가가 화면에 오일, 아크릴릭과 같은 서양미술의 재료나 일상의 기억과 개별적 역사가 담긴 오브제를 얹는 행위 전반을 포괄하며, 임충섭만의 조형 미학의 핵심이자 근원까지 폭넓게 뜻한다. “우리 조형 미학은 획으로의 출발입니다. 단색적 미니멀의 조형 양태로의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오랜 서예 동양화의 그 ‘획’은 우리의 중요한 미학적 근원입니다.”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한편, 임충섭은 1941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196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뉴욕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허시혼미술관과 조각정원,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선재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타베르나 시각예술센터, 시드니대학교 파워미술연구소, 일신문화재단, 아시안아메리칸아트센터, 환기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임충섭 개인전 ‘획’ 전경.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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