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미금의 ‘책’ 한 페이지에 담긴 인생 한 페이지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3.11.17 11:24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동시대적 조형미의 ‘책거리’
다시점과 역원근법 등 민화적 요소
아트조선스페이스, 개인전 ‘The Page’ 28일부터 열어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45.5x53x(2)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72x91x(2)cm. /아트조선
엄미금 작가.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단어가 모이면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이면 한 페이지를 이룬다. 이들 페이지가 한데 엮이면 한 권의 책이 된다. 인간의 삶도 비슷하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과정은 조금씩 달라도 그 인생의 여정을 한 페이지씩 넘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다. 엄미금(64)의 ‘책’도 그러하다. 그의 화면 안에는 한 권 한 권 작은 우주와도 같은 책들이 겹겹이 쌓여 우리네 인생의 희로애락을 비추는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자고로 책은 동서고금의 지혜를 담고 있어 지식의 곳간과도 같다고들 한다. 작가는 이러한 특성을 지닌 책에 매료돼 지난 30년간 책을 모티프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91x72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91x72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117x91cm. /아트조선
 
한국 전통 민화의 맥을 이어온 주요한 작가 중 하나였던 그가 책거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조형적 시도에 나섰다. 해체된 책의 형상을 빌려 작가 고유의 인문적 감성을 캔버스에 자유로이 펼쳐 독창적인 추상 형태를 완성해낸 것.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이를 ‘인문추상’이라고 직접 명명하고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책을 단순화한 감성을 머금은 색면이 서가에 쌓이듯 하나둘 관계를 형성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화면을 책으로 옮긴 듯, 캔버스 위로 과감하게 꽂힌 네모난 색면들은 ‘책을 통한 지적체험’을 시적 울림으로 전달한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인문학적 원형의 책을 캔버스 위에 색면 형태로 풀어낸 엄미금의 신작이 최초 공개되는 자리가 마련된다. ART CHOSUN과 TV CHOSUN이 공동 주최하고 ART CHOSUN SPACE가 기획한 엄미금 개인전 ‘더 페이지(The Page)’가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ACS)에서 개최된다. 오랜 기간 전통 민화 작업을 이어온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한지가 아닌, 캔버스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신작을 내보인다. 민화 중 하나인 책거리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회화 27점을 통해 엄미금 작품 세계의 새로운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를 앞두고 작가로부터 신작에 대한 설명을 들어봤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45.5x53x(2)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30x30x(18)cm. /아트조선
 
─전통 민화 작업에서 지금의 캔버스 작업으로 선회하셨습니다.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두 작업의 겉모습은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아예 다르기보다는 서로 연결되며 궤를 같이하는 작업입니다. 전통 책거리에서 나타나는 다시점이나 역원근법에 매료돼 민화에 빠졌던 제 자신을 상기하며 이를 아크릴 물감과 캔버스로써 재료를 달리해 오늘날의 책거리를 그리고 있는 셈이죠. 민화란 우리 선조의 생활을 보여주는 회화잖아요. 그중에서도 책거리에는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문인의 독서생활과 기물 등에 대한 단상까지도 엿볼 수 있죠. 서가에 의해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분할돼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 주며 생동적인 변주가 부여됩니다. 또한 책거리에서 도드라지는 역원근법과 다시점, 그리고 평면화법이 큐비즘을 연상하기도 해요. 책더미를 자유분방하게 해체시켜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상하고 최대한 미니멀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민화가 멀고 어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닌,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충분히 친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업의 전환은 사용하는 재료와 작업 방식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오랜 시간 이어온 민화 작업에서 캔버스로 바탕지를 옮기고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책가도 작업을 할 당시에는 한지, 비단, 삼베 등을 지지체 삼아 그리곤 했죠. 하지만 20대 때까지만 해도 유화 작업에 몰두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아크릴 물감과 캔버스가 전혀 낯설지 않아요. 그때 당시의 경험을 복기하며 지금 다시 아크릴 작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91x117x(2)cm. /아트조선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민화 작업 당시부터 지금껏 책을 소재로 삼은 책가도 작업에 집중해 오셨죠. 선생님의 예술 세계에서 책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책은 그야말로 지식의 곳간이잖습니까. 제게 학교보다도 더 많은 가르침을 얻게 해준 것은 독서였어요. 실제로 책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영감을 받기도 하고요. 이처럼 제가 책에서 경험한 것들을 제 그림을 마주한 분들께도 전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런 마음으로부터 책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책거리라는 그림이 현대인에게는 낯설거나 다소 무관하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책 읽는 인구가 급감한 시대죠. 이러한 실정에도 계속 책을 그리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책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이들이 종이책보다는 핸드폰에 익숙해진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종이책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요. 종이책만이 지닌 감성과 그 기능은 다른 매체로써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저는 이 책그림을 통해 휴머니티를 전하고 싶습니다. 사람 간의 사이가 급격히 삭막해진 오늘날은 휴머니티의 가치 재정립이 시급한 때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존엄함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합니다. 저는 그 존엄함을 간직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요. 행복의 원천은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죠. 제 그림을 통해 이를 함께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53x45.5x(4)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117x91cm. /아트조선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기존 작업과 비교해 보다 단순화된 조형과 현대적 미감의 컬러가 도드라지는 기하추상적인 화면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점으로써 역동적으로 표현되며 여백을 살리는 등 전통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있는 듯합니다. 이전 민화와 지금 작업의 접점은 무엇입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제 작업에는 다시점과 역원근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제 화면에는 특정한 답이 없습니다. 동양화나 서양화로 구분 짓고 싶지 않아요. 특정 사조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죠. 전통과 현대의 접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하나의 선처럼 두 작업이 연결된다고나 할까요. 그저 보는 이에 따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화면에 여백을 두려고 해요. 관람자가 자신만의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유와 여지를 남기는 거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72x91cm. /아트조선
The Page, 2023, Acrylic on canvas, 45.5x53x(2)cm. /아트조선
 
─다채롭고 다양한 색들이 어우러지며 대비와 조화를 빚어냅니다. 화면에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애쓰신다고 들었어요. 마크 로스코와 같이 색으로써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지요.
 
언젠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적이 있습니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과감하게 칠해진 네모난 색면들이 전부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죠. 로스코는 인간의 감정을 그린 것뿐이라는데, 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작가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추상표현주의라는 카테고리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제 감정을 색으로써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색은 제 그림의 열쇠와도 같아요. 색을 잘 읽으면 제 그림을 더 쉽고 재밌게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절제된 조형미가 모던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이며 동양적인 면모가 풍겨오는 듯합니다. 색동저고리나 옷고름, 누빔이불 등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온고지신’이라고들 하죠?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탄생되듯이 저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제 그림은 감상하기가 쉽고 보는 데 익숙한 면모가 있답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다가오는 11월 말 열리는 개인전의 타이틀은 연작의 명제와 동명인 ‘더 페이지’입니다. 어떤 뜻인지 설명 부탁드려요.
 
종이책은 물론이고 디지털 기술로 제작된 전자책까지도 모두 페이지를 지니고 있죠. 페이지가 없으면 책도 없습니다. 페이지 없이는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의 처음부터 책장을,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야 하잖아요. 우리가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내듯이 말예요. 제 그림을 마주하실 때도 책을 읽을 때와같이 책을 한 페이지씩 넘기듯이 천천히 감상해 주신다면 그 안에 내재된 작은 우주를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