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10.20 18:02
대형 설치작 등 5점 선봬
내년 2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박스에 들어서면 뱃고동 소리를 연상하는 웅장한 음악 소리가 관객을 맞이한다. 공중 곳곳에 매달린 이국적인 식물 이파리와 붉은색 열매 형상을 한 오브제들이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전(展)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한 서사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전시명 ‘백년 여행기’는 1905년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주의 수도 메리다에 도착했던 백여 년 전의 한인 이주기를 의미한다.
서울박스에 설치된 신작 ‘상상곡’(2023)에서의 식물 오브제들은 소리의 반사를 막는 흡음재로 만들어졌다. 붉은색 열매 오브제 안에는 초지향성 스피커가 내장돼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역으로 변환한 초음파 소리가 재생되고 는데, 이 공간을 거닐게 되었을 때 관람자는 고음과 저음의 소리 층을 배경으로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귓가에 맴도는 환청과도 같은 속삭임을 듣게 된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현재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로,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오늘 가장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 등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텔루구어, 인도네시아어 등으로 답하는 내용이 머릿속을 맴도는 상상의 노래처럼 들리는 듯하다. 이는 멕시코의 한인 이주민이 겪었을 낯섦의 감각을 역으로 유추하게 함과 동시에 동질성으로 제한되는 국가 외부의 다중 세계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역사로서의 백년 전 이주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백년초’라는 식물의 설화적 여행기에서 출발했다. 백년초는 백 년에 한 번씩 꽃이 핀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멕시코에서는 노팔 선인장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지난해 9개월간 제주도에서 생활하며 제주 북서쪽 월령리 일대의 백년초 자생 군락을 방문했다.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와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다고 알려진 백년초 이동 설화에서 작가는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 식물 및 사람의 백년 여행기라는 소재를 떠올리게 된 것.
이번 전시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를 연결하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이주와 이국성의 주제를 담은 신작 4점을 포함해 총 5점을 선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이 뒤섞여있는 혼종성의 맥락 속에서 이주민들의 삶의 경험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예술을 통해 낯선 존재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특히 20세기 초 한인 이주라는 다큐멘터리적 서사를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접합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탈구된 시공간의 경험, 이질성과 친숙함의 관계, 이주를 둘러싼 세대 간의 문화적·역사적 간극,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이동하고 번역되는 존재 등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유한다.


정연두는 20세기 초 이민자의 시간과 경험, 기억에 최대한 다가가고자 2022년부터 2년에 걸쳐 멕시코를 3회 방문해 한인 이민 2~5세 후손을 인터뷰했고 그들을 멕시코로 이끈 결정적 동인인 과거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을 방문해 다양한 열대 식물들을 촬영했다.
실제 역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작가의 수행적 연구가 멕시코 이주 서사 내부를 끄집어내는 관계적 통로라면, 작가적 연출을 중심으로 사진과 영상, 텍스트와 사운드, 공연과 설치를 넘나드는 정연두의 복합 매체 활용은 이주 역사라는 고정된 서사 아래 숨겨진 다양한 역설과 모순의 상황과 혼종성의 맥락을 표층으로 떠오르게 하는 시각적 장치인 셈이다. 출품작들은 서사-텍스트-퍼포먼스, 공연-영상이 혼합되어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층위로 완성돼 이주 서사와 이동 감각을 보다 우의적이고 중층적으로 불러오는 듯하다. 전시는 내년 2월 25일까지 이어진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