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9.27 18:26
개인전 ‘창백한 말’, 10월 10일까지 제이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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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 하. 입 안에서 사각거리는 듯한 어감의 산뜻한 이름이 창백하고도 파르께한 그의 화면과도 똑 닮았다. 한 번 듣고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 깊은 이름을 지닌 작가 이목하는 아트씬에 강렬한 족적을 남기며, 지금 이 순간 아트 러버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이머징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랜 시간과 감성이 축적된 듯 여운이 감도는 화면이 지닌 내러티브적 특성은 이목하 그림 앞에서 발길을 쉬 뗄 수 없는 이유다. 개인전 ‘창백한 말’이 10월 10일까지 서울 성북동 제이슨함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나 소셜미디어로부터 발견하고 채록한 동시대 여성들의 빛나는 청춘과 이면의 양가성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업 세계에 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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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끄무레한 듯 아득한 톤의 화면으로 잘 알려져 있죠. 이를테면,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빛바랜 필름 카메라 사진의 그것을 연상하는 레트로 감성이요. 이러한 스타일이 ‘이목하표 그림’인 것을 단박에 알아보게끔 하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작가로서 남들과 구별되는 고유의 기법과 화풍을 지녀야 된다고 믿었어요. 저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질감의 그림이랄까요. 저는 늘 데생만큼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서 데생하듯이 종이 위에 유채를 얇게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법을 시도하게 됐습니다. 유화라고 하면 흔히들 두터운 마티에르를 떠올릴 수 있지만, 저는 오일을 투명하게 희석해 겹겹이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방식인 셈이죠. 저는 그림에서 질감이 주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그림으로부터 얇고 낡은 것 같은 질감이 느껴지신다면 맞게 보신 거예요. 물 빠진 청바지나 빛바랜 사진으로부터 오는 감성과도 같이요. 두꺼운 기성 캔버스천이 아니라, 다른 얇은 천에 희석한 유채를 투명하게 겹겹이 덧칠하는 덕분입니다.
유화에서 쓰이는 캔버스천은 오일이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 안착될 수 있도록 캔버스 겉이 이미 한번 페인트칠이나 코팅 처리가 돼 있잖아요. 저는 종이의 그것을 재현하고 싶어 그림용 천이 아닌, 면으로 된 얇은 천을 구입해 시도해 봤어요. 작업에 흔히들 쓰이는 천이 아니다 보니, 제가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실험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저것 미디엄과 재료를 섞어 칵테일과도 같은 저만의 레시피를 고안해 모색한 결과, 지금의 종이 같은 질감의 느낌을 구현할 수 있게 됐죠. 매일매일 투명한 물감 레이어를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는 작업을 거듭해야만 하니 대작 한 점 끝내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천 위에 걸쳐 얹힌 것 같은 유화 특유의 먹먹함이나 탁함보다는 종이 위 수채의 그것이 연상됩니다. 이러한 기법으로써 화면에 내러티브가 흠뻑 스며드는 경향이 강해지죠. 마치 이면에 뒷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여운이 남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이목하의 회화를 두고 ‘아련하다’라고들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재밌어요. 제 그림 속 인물들도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아련하다는 것은 뭔가 슬프기도, 우울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거지향적인 말이잖아요. 제 화면 속의 인물들 대부분은 20대 여성인데, 이들은 누군가의 과거 그 자체이자, 혹은 누군가의 과거에 한 번쯤은 스쳐 갔을 존재이기도 해요. 저 역시 이들과 같은 20대 여성이고요. 만약 제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미래나 상상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을 그린다면 완전히 다른 의미의 그림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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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듯한, 혹은 잘려 나간 것 같은 사진의 한 귀퉁이 같은 장면을 그려냄으로써 낯선 느낌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기시감 또한 풍겨오는 듯합니다. 너인 것 같기도, 나인 것 같기도 한 화면 속의 이들 여성은 어디에서 왔나요?
이들 인물은 모두 인스타그램에 실제 올라온 사진들로부터 왔어요. 이 플랫폼에는 구글이나 다른 소셜미디어와 구별되는 점이 있는데, 바로 특정 화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에요. 사진을 찍어 올릴 때 사람들은 은근슬쩍 자신이 의도한 장치와 같은 단서 따위를 사진 속에 심어놓더군요. 그들이 어떤 의도로 사용한 장치라도 제 그림으로 오면 그 의미가 전복돼요. 이러한 비틀기도 작업에서 오는 재미 중 하나에요. 이질감을 주는 장난과 위트가 화면 군데군데 있으니 발견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먼저, 인스타그램에서 끊임없이 스크롤하며 웃고 있는 얼굴인 거 같기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인 것 같은 이들의 사진을 찾아 나서죠. 그러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으면, 사진 주인에게 해당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구해요. 대부분의 분들은 이런 제안에 흥미로워하시며 흔쾌히 응해주세요. 그들을 그린 것이긴 하지만, 사실 화면 속의 인물은 그들이 아니에요. 초상화가 아니기에 화면으로 옮겨올 때에는 저만의 재해석이 더해진 까닭이죠.
─인물들은 퇴폐적이면서도 순수하기도, 해맑지만 우울하다거나, 또는 도발적이면서도 차분한 양가적 이미지가 혼재합니다. 양가성, 이중성, 모호함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궁금해요.
상대방이 바라보는 자신과 스스로 자기는 어떻다고 생각하는 게 차이가 있곤 하잖아요. 오죽하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삶의 과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본래 작업이란 것 자체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라, 자연스레 제 내면에 집중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러다가 덩달아 남들을 관찰하는 일도 즐기게 됐어요. 사람들 누구나 이중성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그로부터 혼란을 느끼곤 하죠. 소셜미디어에서는 그런 모습이 더욱 도드라지곤 하는데,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따로, 나의 진짜 모습이 따로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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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대작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아요.
1~2년 전만 해도 작은 사이즈 회화 위주로 그렸는데, 올해 들어서 사이즈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특히 인물 작업들에 더욱 집중하게 되면서 작품 스케일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거든요. 젊은 여성을 작게 그리느냐, 크게 그리느냐에 따라 보는 이에게 다가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죠. 예컨대, 실제 사람보다도 더 작게 그리면 오히려 여성의 연약함을 연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든지요. 가시적이고 효과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이즈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전 ‘창백한 말’이 제이슨함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 ‘창백한 말’이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흥미로워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죠. 다분히 시적인 이 전시명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나요?
다소 엉뚱하고 혼란스럽게 들리죠? 바로 그 지점을 떠올렸어요. 하나만을 콕 집을 수 없이 이것 같기도 저것 같기도 한 양가성이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제 그림은 가까이 다가가 보면 얇은 것 같지만 또 물감이 겹겹이 견고하게 올라와 있잖아요. 또 인물들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띠고 있고요. 이러한 양가성을 아우르는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명명한 타이틀입니다. 영문명은 ‘innuendo’, 즉 우의적이며 돌려 말하는 것을 지칭하고 싶었어요. 창백한 어조가 느껴지면서도 그 기저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을 테고요. 그리고 제 그림 속 인물들이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한 것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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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가장 주목할 만한 이머징 아티스트로 지속적으로 언급돼 왔습니다. 올해 3월 아트바젤 홍콩 디스커버리즈 섹터에서 솔로쇼 부스를 꾸리면서 국제 미술시장에도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고요.
대작을 시도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아트바젤 홍콩이었어요. 체급을 키우는 도전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압박감과 부담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죠. 이때 난생처음 그림을 크레이트에 포장해 해외로 보내는 경험을 해봤는데, 전시장에서 화물 상자를 풀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스 크기가 제 옛날 작업실 크기만 하더라고요.(웃음) 제 키보다도 더 큰 그림과 열심히 싸우며 아등바등했던 기억이 스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만큼 행복하기도, 긴장되기도 했어요.
─10년 뒤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요?
최근 들어 너무나 많은 격변을 겪은 터라 10년 후는 더더욱 상상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10년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일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작업이 더욱 확장되고 팽창될 것이라는 자신이 있어요. 인물을 즐겨 그려왔으나, 더 다채로운 소재와 어젠다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떠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페인팅 자체의 자아가 우선되는 페인터로 남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너무나 많은 격변을 겪은 터라 10년 후는 더더욱 상상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10년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일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작업이 더욱 확장되고 팽창될 것이라는 자신이 있어요. 인물을 즐겨 그려왔으나, 더 다채로운 소재와 어젠다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떠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페인팅 자체의 자아가 우선되는 페인터로 남고 싶습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