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8.29 17:33
물은 생명이자 소멸… 물방울로써 치유하고자 한 작가의 갈망
‘물방울 연대: The Water Drops from Paris to Korea’展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물방울 변천사
9월 6일부터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


물방울, 그것은 입으로 훅 불기만 해도 흩어져 버릴 듯 여리고 연약하다. 그러나 김창열(1929~2021)의 화면에서는 언제나 영롱히 반짝이며 보는 이의 마음을 고요하며 안연히 다독여 준다. 물이란 본디 순수하고 온화하며 생명력을 지니면서도 강력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요소다. 액체 상태에서 기화되고 다시 이는 액체로 돌아오길 거듭하며 같은 과정을 무한 반복하는, 즉 물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소멸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냥 물방울이 아니다. 한 방울 한 방울에 김창열의 반백 년 물방울 예술 세계와 물로써 치유하고자 했던 작가의 갈망이 함축돼 있다.

김창열은 1961년 파리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국제 미술계로의 진출에 대해 자신감을 얻어 도미를 결심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뉴욕으로 건너간 작가는 이 시기 주로 추상화, 그중에서도 팝아트나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업에 몰두했는데, 기하학적 조형을 반복시키며 입체적으로 보이는 착시를 연출하는 식이었다. 물방울 작업이 시작되기 이전인 이 시기에 작가는 우리가 아는 ‘김창열표 물방울’에 비해 다소 되직한 물성의 불투명한 형상을 화면에 그리곤 했다. 이를테면, 피고름 정도의 농도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담긴 것이다. 구불구불한 추상적인 형상을 띠는 것을 두고 작가는 ‘창자의 그림’이라고 설명한 적도 있다. 그는 역동적으로 일렁이는 듯한 구형 형태를 반복적으로 묘사하다가, 점차 물방울이나 액상 등을 연상하는 구체적인 모양을 캔버스에 옮겨갔다.
이른바 ‘물방울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73년 파리 놀 인터내셔널(Knoll International)에서 물방울 그림을 첫선을 보이면서부터다. 화면 밖으로 흘러나올 듯 실감 나는 물방울이 본격적으로 화면 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물방울 작업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초기작 중 하나인 ‘Water Drops’(1973)를 보면 이후 작업과는 구별되는 형태의 물방울을 볼 수 있는데, 점성을 지닌 듯 뭉쳐 흐르는 것 같은 모양은 영롱하고 아름다운 조형성이 강조되는 물방울과는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물을 단순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빛에 반응하고 투과하며 그림자를 빚어내는 물의 특성을 빌려, 김창열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물방울에 투영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김창열에게 물방울이란 그로 인한 상실감과 상흔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작가는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하고 무(無)로 돌려보내고자 한다. 불안도 공포도 허(虛)로 전복해 평안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작업 초기에는 물방울을 단일 소재로 삼아 투명함이나 반사되는 성질을 강조하곤 했는데, 특히 마포나 나무판 등과 같은 거친 텍스처가 도드라지는 지지체를 사용함으로써 물방울의 영롱함을 더욱 부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창열 작업 세계에서 물방울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화두가 태동하게 된다. 바로 문자다.

작가는 프랑스 신문 ‘휘가로(Le Figaro)’ 위에다가 물방울을 그려 넣은 ‘휘가로지’(1975)를 발표하며 화면 안에 문자를 끌어들인다. 신문을 옮겨 쓰거나 글자를 해체해 화면에 그려 넣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천자문을 고정 소재로 도입한다. 천자문은 우주와 자연, 인간 삶의 이치 등에 관한 동양사상의 정수를 담은 고시(古詩)다. 조부로부터 배운 천자문과 유년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문명의 근본과 세상의 이치가 담긴 천자문을 깨치던 배움의 원점으로 돌아가 정신적 수행을 실현하고자 한 작가적 의지가 읽힌다. 무한한 우주적 상징체계를 동양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담긴 대목이다. 천자문 위에 맺힌 물방울은 그 투명함이 더욱 돋보이며 동시에 문자의 조형미 또한 강조돼 천자문은 김창열 작업 세계에서 주요한 변곡점 중 하나로 꼽힌다. 생전 작가는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끝없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이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라고 말했다.


물방울 그림이 태동한 1970년대부터 작고 이전의 201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김창열의 물방울 변천사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김창열 개인전 ‘물방울 연대: The Water Drops from Paris to Korea’가 9월 6일부터 10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서문을 작가의 차남 김오안 감독이 맡아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개봉했던 김창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The Man Who Paints Water Drops)’의 공동 감독이기도 한 김오안이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기억을 이번 전시를 위해 글로 풀어낸 것. 김 감독은 전시 서문에서 “생전 아버지께서는 늘 품위와 존엄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이런 말들의 의미가 다소 퇴색했을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작품은 여전히 그 의미를 아름답게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라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물방울 회화를 처음 선보인 1973년 제작된 초기작 ‘Water Drops’와 천자문과 물방울이 서로 종횡하는 300호 대작 ‘Recurrence’(1993)를 포함해 20여 점이 내걸린다. 오로지 물방울 하나에 50년을 천착했던 김창열의 예술 세계 일대를 조명한다. 아울러, 전시 퍼블릭 오픈을 하루 앞둔 9월 5일에는 아트 필름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특별 상영회가 열린다. 김창열의 예술과 삶을 진솔하게 포착한 다큐멘터리를 김창열의 회화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