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8.25 18:5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대규모 개인전 ‘김구림’ 개최
1950년대부터 2020년대 근작까지 230여 점
영화·무용·음악·연극 종합 공연 통해 ‘총체 예술가’ 면모 재조명
내년 2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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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작품을 보여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24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언론 간담회에서 구순을 내다보는 ‘아방가르드’ 김구림(87)은 파격적이지 않음에 대해 연신 사과했다. 실험 미술의 선구자인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25일부터 내년 2월 1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를 위해 작가는 미술관 외벽을 거대한 하얀 광목천으로 두르고 싶었으나, 여러 행정 절차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감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미술관을 천으로 싸맨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시작은 50여 년 전인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대 청년 김구림은 경복궁 현대미술관 외벽에 흰 띠를 뱅 두르고 그 앞에 땅을 파고는 관을 뒀다가 철거당한다. 고리타분한 작품을 거는 미술관은 관 속에나 들어가라는 도발적인 메시지였다. 반백 년이나 지난 오늘날, 시대를 앞서간 그때의 아방가르드를 다시 소환하고 싶었던 김구림이었지만, 이번에도 그의 계획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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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측은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외벽을 천으로 감싸려면 문화재청 등 관련 부처와 협의가 필요한 상황으로, 전시 개막 전까지 행정 절차를 마무리 지을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작가는 “당시(1970년)에는 설치라도 해보고 철거됐지만 지금은 시도조차 못 했다. 국현이 이런 걸 알았더라면 여기에서 전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을 말살하는 처사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일갈했다.
김구림의 ‘기행’이 미술관 싸매는 것뿐이었으랴. 1960~1970년대 김구림의 작품은 잔디밭에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태워놓거나, 또는 40톤 초대형 얼음이 실온에 녹아가는 모습을 선보이는 식이었는데,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예술이라며 들고나온 탓에 경찰서에 연행되는 것은 기본, 집단 린치를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세상은 그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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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파행적이고도 비주류적 행보는 그를 전위 예술의 선구자로 이끌었다. 김구림은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1/24초의 의미, 1969),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등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작품을 여럿 남겼으며, 이때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 등 세계적인 미술기관 곳곳에 소장됐다.
이번 전시에는 김구림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하는 230여 점의 작품과 60여 점의 아카이브 자료가 내걸리며, ‘총체 예술가’로서의 김구림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도 준비된다. 전시는 작품을 시기별로 나눠 6전시실과 7전시실 두 곳에서 열린다. 6전시실에서는 얼음을 주재료로 사용한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한국 실험영화사의 기념비적인 ‘1/24초의 의미’(1969)를 포함해 1960년대 초반 비닐, 불, 천 등을 이용해 제작한 추상 회화, 1960년대 말 ‘회화 68’의 구성원으로 옵아트를 접하며 제작한 일렉트릭 아트,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머물며 제작한 설치작 등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주목해 온 ‘현전과 현상’에 대한 오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다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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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시실에서는 작가가 1984년 도미 후 자연에 관심을 가지며 제작한 실험적인 회화를 볼 수 있다. 나뭇가지 등을 화면에 부착해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 시기는 작가가 대표 연작 ‘음과 양’ 작업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음양이란 상반된 속성을 소재로 삼아, 대립하는 양극이 세계의 일부로 공존하는 음양의 이치를 평면과 오브제,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 시각화하고자 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김구림은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제작한 콜라주 기법의 ‘음과 양’ 평면 작업부터 2000년대 중반 이후 물질문명의 부산물을 이용해 제작한 오브제 ‘음과 양’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해당 화두에 천착하고 있다. 이처럼 7전시실에서는 회화와 판화, 설치, 오브제 등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의 예술적 역량과 새로운 방법론을 향한 모색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김구림의 공연이 9월 7일 오후 2시 MMCA다원공간에서 상연된다. 이번 공연은 작가의 작품을 기반으로 ▲영화 ▲무용 ▲음악 ▲연극 총 네 개 파트로 꾸려진다. ‘1/24초의 의미’와 ‘문명, 여자, 돈’(1969)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1969년에 시나리오, 안무, 작곡을 한 ‘무제’(무용),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이 각 15분간 차례로 선보인다. 무용-음악-연극에는 70여 명의 출연자가 참여한다. 관람객은 해당 작품들을 통해 1969년부터 공연을 제작하며 비언어적 소통의 방식을 추구했던 김구림의 실험성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나타난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심장박동기 삽입 시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 형형한 눈빛은 변함없는 30대 청년의 그것이었다.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이지만, 파격적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파격적인 김구림은 여전히 문제적인 아방가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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