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7.17 17:53
김근태·김영리·민병헌·오세열·이배·최영욱·권여현·김찬일·함명수·김현식
아트조선·TV CHOSUN·뉴시스 연합 ‘아트픽 30’
8월 9일까지 한가람미술관 2층 전관




지난해 한국 미술 시장은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Frieze)’ 서울판의 성공적인 개최부터 미술품 거래 총액 사상 첫 1조원 돌파에 이르기까지 한국 동시대 미술을 향한 대중적 관심도가 어마어마한 가운데,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과 미래를 다층적이고 심도 있게 보여주는 전시 ‘아트픽 30(Art Pick 30)’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ART CHOSUN(아트조선), TV CHOSUN, 뉴시스 미디어 3사가 공동 주최하는 미디어 연합 아트쇼로,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지형도를 보여주는 작가 30인을 선보인다. 이들 작가는 주최 미디어 3사가 주목하고 기사로써 소개한 바 있는 미술가들이며, 특히 미디어가 검증하고 엄선한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생성과 전개 그리고 미래를 대표한다.
서로 다른 경향과 다채로운 소재로 고유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 온 미술가 30인이 참여하는 전시인 만큼, 3부작에 걸쳐 전시장에 작품이 설치된 순으로 작가들을 소개함으로써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 ‘아트픽 30’전(展) 관람 설명서를 연재한다.



◆‘숨결’이 느껴지는 김근태의 그림
전시장에서 윤형근, 김창열, 박서보 등 대표적인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회화는 바로 김근태의 ‘숨’과 ‘결’ 연작이다. 수백, 수천 번의 붓질이 거듭되며 붓결이 오롯이 새겨진 김근태의 대표 시리즈 ‘결’이 이번 전시에 내걸렸다. 그는 단색 물감을 바르고 말리고 또 바르기를 반복하며 동시에 마음은 비워내는 수행적 태도를 회화에 투영해왔다. 김근태의 그림은 화려한 꾸밈이나 수식 없이 담백한 단일 색을 띠고 있는 것 같지만, 한가지로 보이는 그 색상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수 가지의 색상을 수십, 수백 번 층층이 뒤덮는다. 몇 겹이고 포개진 두터운 덧칠로써, 작품 표면에는 세필이 하나하나 훑고 지나간 듯 섬세한 붓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또 다른 대표작 ‘숨’에서는 돌가루라는 재료의 수용성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개입으로 절제된 의식을 통해 칠을 반복하는데, 그 과정에서 물감이 캔버스 옆으로 흘러내리거나 돌가루가 캔버스 표면 위에 기포를 만들기도 한다. 이때 캔버스 천은 마포가 아닌 광목천을 사용하며 이는 돌가루의 물질적 질감을 더 도드라지게 해준다.
◆무수한 컬러의 향연, 김영리의 회화
김근태의 회화 옆으로는 화려한 컬러의 화면이 관객을 맞이한다. 무수한 작은 구슬이 알알이 모여 물비늘처럼 고요히 일렁이는 환시를 일으키는 듯한 김영리의 화면은 아른거리는 잔물결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는 기하학 문양들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며 조화와 아울러 긴장을 자아내는데, 이처럼 수많은 원형이 오밀조밀 모여 있으나 같은 형상은 없다는 것이 인간사를 닮았다. 작은 점과 같은 이들 동그라미 하나하나는 각자 독립된 객체로서 존재하지만 또 동시에 서로 연결돼 이어지며 마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한다. 김영리의 회화에서 특징적인 조형은 얼키설키 엉킨 선(線)인데, 캔버스를 촘촘히 뒤덮은 픽셀들 사이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줄기가 뻗어 나와 화면을 종횡한다. 마치 닻줄과도 같이 캔버스에 견고히 자리 잡은 이 선들은 때로는 미스터리한 미로 같아 보이기도, 틈새 하나 없는 원형들 사이에 긴장을 완화하는 완충 지대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민트색, 초록색 등 현대적인 색감의 신작을 공개했다.


◆아날로그 고집 40년 ‘민병헌 그레이’
폭포, 설원, 잡초, 안개 등 자연을 피사체로 삼아온 민병헌은 특유의 아렴풋한 모노톤, 이른바 ‘민병헌 그레이(grey)’라는 독자적인 톤을 구현해 국내외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한 사진작가다. 민병헌은 처음 기록된 이미지에 인위적인 조작이나 보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촬영하는 순간, 작가가 보고 느꼈던 감각이 고스란히 각인된다.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시카고 현대사진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산타바바라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과 파운데이션 등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해외에서의 입지도 견고하다. ‘아트픽 30’전을 위해 작가는 인기 시리즈 중 하나인 ‘Waterfall’(2009)을 60호 사이즈로 출품했다. 아울러 근작 중 하나인 ‘남녘유람’(2021)도 내걸려 그의 다채로운 연작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은유가 만들어낸 조화로운 아이러니 ‘오세열’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이 삐뚤빼뚤한 글씨체, 어눌한 듯하면서도 자유로운 필치는 오세열 고유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다. 생각지 못한 곳에 불쑥 자리한 작은 오브제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고 수수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 모여 이뤄낸 잔잔한 화합이 그의 화면에 펼쳐진다. 이들 콜라주는 자신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한 존재감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은유성은 오세열의 작업 근간을 이루는 큰 갈래 중 하나다. 이 덕분에 감상자는 그의 작품 앞에 발길을 오래 머물 곤 하는데, 볼 때마다 다르고 보는 사람마다 또 다른 까닭이다.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100호 대작과 함께 강렬한 레드 컬러의 20호 소품도 감상할 수 있다.



◆숯으로써 생동하는 한국의 정신성… 이배
이번 전시에서는 이배의 대작들을 선보인다. 숯과 수묵으로써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 온 그가 숯을 재료로 택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1989년 도불해 파리에 터를 잡은 작가에게 당시 자신의 정체성, 나아가 한국의 전통성을 탐구하고 구현해내기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숯을 접한 이배는 숯에서 어린 시절 자연을 벗 삼아 뛰놀던 자신을 발견한다. 한국의 자연과 고향 그리고 한국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숯은 이때부터 이배의 작업에서 가장 주요한 소재가 됐다. 이배의 화면에는 색이 없다. 오로지 흑백으로만 한국의 정신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주된 화제인 사군자를 보아도 난초와 대나무를 굳이 녹색으로 칠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배의 숯덩어리는 무한한 검정의 획이 되고 작품이 놓인 공간은 이를 받쳐주는 여백으로 작동된다.
◆우리네 인생사가 ‘최영욱’의 달항아리에
이번 전시에는 달항아리 그림 ‘카르마(Karma)’ 시리즈로 아트 컬렉터의 수요가 높은 최영욱의 회화도 내걸렸다. 인연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형성되듯,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 달항아리 역시 다른 차원의 만남이 형성한 새로운 인연과 같다. 우주를 품고 있는 듯한 그의 달항아리 그림에 많은 이들이 매료되는 이유다. 특히 최영욱은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가 구입하고 자택에까지 초대한 사실이 알려지며 이름을 알렸는데, 팬데믹 중인 지난 2020년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헬렌 J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완판 행렬을 이어갔다. 그의 달항아리는 단순히 달항아리를 묘사한 것이 아닌, 우리네의 인생길을 담고 있다. 끊기고 이어지는 선들은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이 반복되는 인생사를 표현한 것으로, 도자기를 우리의 인생사와 닮았다는 작가의 관점으로부터 기인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최신작 ‘Karma202305-28’(2023)과 100호 대작 등을 출품했다.


◆낯선 곳의 일탈자 ‘권여현’
추상화들 사이로 구상화가 눈에 띈다. 바로 권여현의 회화다. 통통 튀는 컬러와 흥미로운 화면 구성만 보면 2030 젊은 작가의 그림으로 짐작되나, 그는 환갑에 이른 중견 작가다. 마치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듯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의 회화는 자꾸만 화면 이면의 서사를 궁금하게 만든다. 속도감 있는 빠른 필치와 밀도 높은 내러티브적 화면 구성은 권여현 특유의 조형적 특성이다. 작가는 ‘아트픽 30’전에 ‘낯선 곳의 일탈자들’이라는 다소 흥미로운 타이틀의 연작을 대거 내걸었다. 휴가철 풍경이나 여행지를 연상하는 듯한 그의 그림을 마주하면 잠시나마 망중한에 빠지는 듯하다.
◆김찬일, “회화적이지 않은 회화를 위하여”
조각적 오브제를 활용해 회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집중해온 김찬일은 특유의 수행적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견 작가다. 그는 작은 조각을 하나하나 캔버스 표면에 세밀하게 부착 후 채색을 거듭해 화면을 완성해낸다. 단순한 평면과는 구별되는 부조회화로서 캔버스 자체가 오브제로서도 기능하는 듯하다. 평면에서의 물감으로 입체감을 냄으로써 탈회화적인 회화를 구현해낸 셈이다. 캔버스 위의 작은 조각들이 만들어 내는 파동과 에너지,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촉각적인 화면의 생성은 빼놓을 수 없는 김찬일표 회화의 오리지널리티다. 이번 전시에는 파스텔 색감의 최신작들이 내걸렸다.



◆꿈틀대는 생동력 ‘함명수’
보드랍고 포근한 실제 털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한 함명수의 회화도 눈여겨봄 직하다. 작가는 인생을 바꾸는 글귀 한 구절, 영화 한 편처럼 누군가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돼 줄 수 있는 그런 그림, 즉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기운을 받는 그림이야말로 보는 이에게도 생명력을 전달할 수 있을 걸로 믿었다. 이런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Alive’(2023)는 꽃을 확대해 세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마치 꽃이 꿈틀대는 것처럼 다가온다.
◆김현식의 무수한 선(線) 사이에는 우주가 있다
각기 다른 높낮이의 5개 작업이 연달아 붙어 있어 눈길이 간다. 김현식의 ‘Who Likes Blue?’(2017)이다. 대범한 원색의 무수한 선(線)들로 이뤄진 김현식의 작업은 일견 단순 평면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천, 수만 가닥의 선들이 모여 이룬 3차원적 공간감을 지닌 조각에 가깝다. 강렬하고 화려한 컬러의 반짝이는 겉모습에 먼저 매료되는데, 홀린 듯 화면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면 화면 안 깊숙이 펼쳐지는 심해와도 같은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그는 레진을 굳힌 뒤 표면을 송곳이나 조각칼로 긁어내고, 그 상흔을 물감으로 덮어 다시 레진을 올리는 과정을 거듭한다. 작가가 칼로 한 줄 한 줄을 긁어 파낼 때마다 매번 다른 선들이 끊임없이 중첩되고 이를 되풀이함과 동시에 첩첩이 쌓여가는 시간의 궤적까지도 화면 아래 심어지며 무한한 입체감의 화면을 완성하게 된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