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0.05 18:46
윤형근·김창열·이우환·박서보·쿠사마 야요이
현대미술 거장 5인 ‘더오리지널II’展
13일부터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
윤형근 1970년대작 ‘천지문’, 1990년대작 등 출품


윤형근(1928~2007)의 화면에서는 진한 먹내가 배어 나오는 듯하다. 표백 처리를 하지 않은 천이나 마포 위에 유화 물감을 있는 그대로 스미고 번지도록 함으로써 서양의 재료이지만 동양의 정서가 침윤한다. 담박하다 못해 절제된 조형미는 기품 있는 선비의 정신을 연상하기도 한다. 실제 작가는 선비적 기질이 강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자신의 그림 역시 추사 김정희의 서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전 회고한 바 있다. 그는 골동품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주말이면 인사동에 나가 고미술과 고가구를 구경하는 것이 큰 취미였다고 하니 보통 ‘청다색’이라고 일컬어지곤 하는,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오묘한 윤형근의 기둥 빛깔은 한국의 먹빛이란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윤형근이 본격적으로 국제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후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포르투니미술관(Palazzo Fortuny)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 데이비드 즈워너 뉴욕에서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윤형근 특유의 ‘맛’에 세계 아트러버들은 매료됐다. 근래 들어 젊은 큰손들에게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배경에는 BTS RM의 영향이 크다. 윤형근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RM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윤형근 작품 사진을 올리며 작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 오고 있다.


번짐과 ‘문’을 연상하는 형상이 특징인 이른바 ‘천지문(天地門)’ 시리즈는 1973년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제작된 일련의 작업을 일컫는다. ‘하늘’의 색인 블루(Blue)와 ‘땅’의 색인 엄버(Umber)를 섞어 검정에 가까운 색을 만든 윤형근은 여기에 테레빈 기름 등을 섞어 농담을 조절해 먹과 같은 깊이감의 검은 빛깔을 구현했다. 특히 작가는 마포 위에 큰 붓으로 냅다 내려그음으로써 기둥 모양을 만드는데, 이러한 모양이 ‘문(門)’을 떠올린다고 해 작가 스스로 ‘천지문’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 그림의 명제(命題)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이러한) 구도(構圖)는 문(門)이다.”(1977년 1월)


이후 그의 화업에서 언급할 만한 변곡점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1년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만남이다. 윤형근은 저드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단순화된 형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검은 칼럼은 보다 엄정하고 단호해지며 또렷한 사각의 형태를 띠게 되며, 색채 또한 더욱 명백해진 검은빛을 내뿜게 된다. 한결 엄격하며 형상이 간결해진 것인데,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갈수록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엷은 번짐 따위는 서서히 종적을 감춘다. 저드 특유의 미니멀리즘에 미학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둘은 동료이자 친구로서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를 계기로 윤형근은 단순함과 질박함을 합일하며 동시에 동서양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하게 된 시기로도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 윤형근이 원래부터 전업 작가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활동에만 온전히 매진하게 된 것은 1973년 즈음으로 알려지는데,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으나, 재직 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입학한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고 교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돌이켜보면 울분의 시기를 관통하던 이때가 윤형근에게는 터닝 포인트였는데, 이 사건으로 요시찰 인물로 등록돼 마땅한 직업을 얻기 힘들게 된 그가 이를 기점으로 회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정진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대쪽 같은 성정으로 인해 역경을 겪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47년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에는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 시절 시위 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전쟁 중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에는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자신의 그림과도 같은 올곧은 성미와 절개를 작가는 감추려 한 적이 없었다.
윤형근은 평소 작가의 본성이 작품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작품이 정신성을 배제한 채 즉물적일 수 없으며, 그림을 그리는 자의 타고난 성품이 고스란히 화면에 반영된다고 윤형근은 믿었다. 우리가 그의 회화를 마주하면 고결함과 고귀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지난해 TV CHOSUN 개국 10주년을 기념해 김환기, 박래현, 김창열, 이우환, 유영국 등 한국 현대미술 거장 5인을 한자리에 모으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흥행 전시 ‘더오리지널(The Original)’이 돌아온다. 오는 13일 서울 중구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막을 올리는 ‘더오리지널II’전(展)에는 지난해에 이어 김창열과 이우환의 회화가 내걸리며, 윤형근과 박서보 그리고 쿠사마 야요이가 새롭게 합류한다.
윤형근의 화업 일대에 걸쳐 시기별 작업들 각각 개성과 의미를 지니지만, 그중 1990년대 작업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대담해진 작가의 농익은 화풍을 볼 수 있다. 특히 저드와 교류하면서 변화와 모색의 초기 단계에서는 번짐이 어느 정도 배어 나오나 기둥은 이전에 비해 확연히 힘이 실린 것이 확인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 1992년 제작된 두 점이 내걸린다. 아울러, 1990년대와 구별되는 ‘천지문’ 시기의 작업 ‘Umber Blue '77’(1977)과 면포에 작업된 ‘Umber '90-109’(1990) 등도 공개된다.

‘더오리지널 시즌2’라는 별칭이 붙은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이들 거장 5인의 예술세계를 다각도로 조망하기 위해 기획된 귀한 자리로, 독창적인 화법을 구축한 다섯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를 재조명함으로써 동아시아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늘날 국제 미술계에서 대체할 수 없는 견고한 입지를 지닌 이들 5인의 작품은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보는 이에게 큰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한편, 이번 전시는 <아트조선>과 TV CHOSUN의 공동 주최로 11월 5일까지 이어진다. 무료. 화~토 10:00~18:00. (02)736-7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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